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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 진잠동(鎭岑洞)
  • 성북동(城北洞)
  • 세동(細洞)
  • 송정동(松亭洞)
  • 방동(芳洞)
  • 원내동(元內洞)
  • 교촌동(校村洞)
  • 대정동(大井洞)
  • 용계동(龍溪洞)
  • 학하동(鶴下洞)
  • 계산동(鷄山洞)
  • 온천동(溫泉洞)
  • 봉명동(鳳鳴洞)
  • 구암동(九岩洞)
  • 덕명동(德明洞)
  • 원신흥동(元新興洞)
  • 상대동(上垈洞)
  • 복룡동(伏龍洞)
  • 장대동(場垈洞)
  • 궁동(弓洞)
  • 어은동(魚隱洞)
  • 구성동(九城洞)
  • 갑동(甲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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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산동(案山洞)
  • 외삼동(外三洞)
  • 신성동(新城洞)
  • 가정동(柯亭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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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동(長洞)
  • 방현동(坊峴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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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진동(德津洞)
  • 하기동(下基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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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운동(自雲洞)
  • 신봉동(新峰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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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지동(文旨洞)
  • 원촌동(院村洞)
  • 구즉동(九則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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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탑립동(塔立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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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평동(官坪洞)
  • 송강동(松江洞)
  • 금고동(今古洞)
  • 대동(垈洞)
  • 금탄동(金灘洞)
  • 신동(新洞)
  • 둔곡동(屯谷洞)
  • 구룡동(九龍洞)
  • 진잠동(鎭岑洞)
     백제 때에는 진현현(眞峴縣)에 속했고, 통일신라 때에는 진령현(鎭嶺縣)에 속했으며, 고려 초에는 기성부(杞城府)에 속했다가 1018년(고려 현종9)부터 공주목에 속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진잠현에 속했으며 말기인 1895년(고종32)에는 진잠군(鎭岑郡)에 속했다.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행정구역 개편 때 대전군 진잠면에 속했다가 1935년 11월 1일 총독부령 제112호로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할 때 대덕군에 속했다가 1987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 12007호로 대전시 중구에 편입되었고, 1988년 1월 16일 대전시 조례 제1616호로 원내, 교촌, 대정, 용계, 학하, 계산동이 유성출장소에 편입되었다.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49호로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유성구 진잠동이 되었고, 다시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89호로 직할시가 광역시로 개칭됨에 따라 대전광역시 유성구 진잠동이 되었다. 진잠동은 과거의 진잠현 현청이 자리하고 있던 지역으로, 성북동, 세동, 송정동, 방동, 원내동, 교촌동, 대정동, 용계동, 학하동, 계산동 등 10개의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 성북동(城北洞)
     성북동은 동북으로 원내동, 교촌동, 대정동, 계산동과 경계를 이루고 남서로는 세동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서북으로는 금수봉 능선을 경계로 공주시 반포면 계룡산과 접해 있고, 동남으로는 서구 봉곡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성북동 산성 뒤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름을 잣뒤 또는 성북(城北)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금수봉과 백운봉에서 발원한 금곡천이 성북동 복판을 가르며 흐르는 양편의 들판과 산 밑에 자리한 성북동의 마을로는 잣뒤, 깊은댕이, 주막거리, 굿개말, 동편, 서편, 건너뜸, 신촌, 새뜸, 세집매 등이 있다.
     잣뒤는 잣디성북이라고도 부른다. 방동 새우내 마을의 북서쪽에 아래위로 흩어져 있어 아래잣뒤와 웃잣뒤라 부르고, 합해서 부를 때는 잣뒤라고 한다. 이곳을 잣뒤라 부르는 것은 성북동산성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잣뒤는 성북동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양달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양지뜸과 응달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음지뜸을 합하여 아래잣뒤라고 한다.
     깊은댕이는 심동(深洞)이라고도 하는데 굿개마을 동남쪽으로 방동저수지를 남쪽으로 하고 조성된 마을이다. 마을이 깊은 산속에 자리해 있다고 해서 깊은댕이라 부르고, 주막거리는 성북동 웃잣뒤의 동편과 서편 마을의 입구에 있는 나무 근처에 자리한 마을로, 옛날 주막이 있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굿개말은 구포(九浦)라고도 부르는데, 성북동 동편 마을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을 굿개말이라고 부른 것은 많은 내(川)가 모여든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아홉 마리의 개가 밥을 먹는 형국 또는 개가 아홉 마리의 새끼를 낳아 품고 있는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동편(東便)은 동편말이라고도 하는데, 성북동 아래잣뒤에서 웃잣뒤로 가는 길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고, 서편(西便)은 서편말이라고도 하는데 웃잣뒤의 동편마을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부른다. 건너뜸은 물건너라고도 부르는 마을로 성북동 서편 마을의 서쪽 금곡천 건너에 있는 마을이라서 그렇게 부른다.
     신촌은 신뜸이라고도 부르는데 성북동 서편 마을 북쪽에 새로 된 마을로 옛날 신씨(愼氏)가 처음 마을을 만들었다고도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새뜸은 신뜸 마을의 서쪽에 새로 된 마을을 가리킨다. 세집매는 성북동 서편 마을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집이 세 집뿐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 세동(細洞)
     세동은 계룡산의 한 줄기를 경계로 하여 동북에 성북동과 접해 있고, 서남에서 서쪽으로는 송정동과 계룡시에 이웃하고 있다. 그리고 동남으로는 방동과 접해 있고, 서북으로는 공주시 반포면 계룡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의 관암산(冠岩山)에서 발원하여 방동 앞 두계천에 합류하는 세동천을 따라 가늘고 긴 골짜기에 자리한 동네인 세동에는 상세동(새뜸, 속뜸, 큰뜸, 장승거리), 중세동(사봉, 구억말, 음지뜸, 양지뜸), 양새터골 등의 마을이 있다.
     세동은 가는골이라고 하는데, 간은동(艮隱洞)이라고도 부른다. 가늘고 긴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가는골이라 불렀고, 이를 한자로 의역하여 세동(細洞)이라 부르는 동네라는 설과 이곳이 신도안에서 볼 때 간좌(艮坐)의 방향으로, 사람이 은거(隱居)할 곳이라 하여 간은동이 되었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상세동은 위가는골이라고도 부르는 마을로 가는골의 가장 위쪽 세동 소류지 아래에 있는데, 새뜸, 속뜸, 큰뜸, 장승거리 등을 통칭한다.
     새뜸은 속뜸 남쪽에 자리한 마을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촌(新村)이라고도 부르고, 속뜸은 큰뜸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세동 산골 깊숙이 마을이 자리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큰뜸은 속뜸 남서쪽에 자리한 마을로 세동천을 동쪽에 두고 있는, 상세동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마을이라 그렇게 불렀다. 장승거리는 상세동 입구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장승과 돌탑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세동은 중가는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상세동의 아래쪽 하세동의 위쪽에 흩어져 있는 마을, 즉 사봉, 구억말, 음지뜸, 양지뜸 등을 통칭한다. 
     사봉(沙峰)은 구억말 남쪽에 있는 마을로 주위가 모래 언덕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구억말은 사봉 북쪽 중세동의 구석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궉말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마을과 그 주변의 지형이 마치 개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하여 구억들이라 붙여졌다고 한다. 음지뜸은 양지뜸 동쪽, 응달진 곳에 자리해서 응달뜸, 응달말이라고도 하며, 양지뜸은 구억말 북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양달말, 양달뜸이라고도 한다. 양세터골은 장승거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달리 양지터골, 양사타골, 양선기(兩仙基)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송정동(松亭洞)
    송정동은 동북으로 세동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 계룡시와 시계(市界)룰 이루며, 남쪽으로는 두계천을 경계로 하여 계룡시와 접해 있다. 
     송정동에는 소정이, 반송미, 선창이, 괴바우, 갱골, 텃골, 대숲말, 과캐, 벌말, 안골, 위뜸, 한배미들, 일반뜸 등 많은 마을이 있다.
     소정이는 반송미 서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소젱이, 소징이, 송정(松亭)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은 소나무가 정자처럼 서 있으므로 그렇게 부르고, 반송미는 소정이마을 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달리 반송(盤松)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을 반송미라 부르는데는 마을 뒤 밋밋한 산의 모양이 소반처럼 생겨, 이 마을이 그 소반을 놓고 밥을 먹는 형국이라 그렇게 되었다는 설과 옛날에 마을에 큰 반송이 서 있어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선창이는 선챙이, 선창(仙倉)이라고도 부르는데, 두계천 동쪽에 있는 괴바우, 갱골, 텃골, 대숲말 등을 통틀어 이른다. 도참설(圖讖說)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12골의 명당지가 있어 12선창이라 부른다고 전한다. 그 12골 중 갱골, 텃골, 뒷골, 말골 등 11골의 명당자리는 거의 확인되지만, 한 곳은 도참설로도 확인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은 옛날 선녀의 창고여서 선창이라 부른다는 유래가 전하는가 하면, 정감록에 따라 신도안에 정씨가 도읍을 하면 배터 즉 선창(船艙)이 되는 장소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도 한다.
     괴바우는 대숲말 안쪽에 있는 마을로 갱골, 또는 가양골, 개양골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아홉 마리의 개가 밥을 함께 먹는(九狗同食)다는 형국을 지닌 곳이라는 데서 유래하고, 텃골은 소정이의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기곡(基谷)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때 기성현(杞城縣)의 사직단터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숲말은 선창이의 원마을로서 갱골 남쪽에 있는데, 대나무 숲이 울창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과캐는 곽해(郭海) 또는 각화(各化)라고도 부르는 마을로 벌말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옛날 피난을 내려온 곽씨들이 한 때 살다가 떠난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벌말은 평촌(坪村)이라고도 부르는 마을로, 텃골 서쪽애 자리하고 있다. 들판에 자리하여 벌말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마을에는 신석기시대의 토기와 구리도장(銅印)이 출토됨으로써 이미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이곳에 살았다는 것을 추측케 한다.
     안골은 송정마을 안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내동(內洞)이라 부르기도 하며, 위뜸은 소정이의 오른편에 새로 생긴 마을이고, 한배미뜸은 안골로 들어가는 입구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이 곳에 큰 들이 있어 한大+배미+들이 합쳐져서 한배미들이 되었으며, 일반뜸은 대숲말 앞에 자리한 마을이다.
  • 방동(芳洞)
    방동은 동남쪽으로 서구 원정동과 구계(區界)를 이루고 남서쪽으로는 두계천을 사이로 계룡시와 시계(市界)를 이룬다. 방동저수지에서 계룡역에 이르는 계백로 양쪽에 넓게 자리한 방동은 방골, 방죽골, 계방골, 삼한이, 안삼한이, 산샛골, 나뭇골, 선사골, 삿갓집, 큰동네, 주막거리, 주동, 예방동, 새우내, 새터말, 하세동, 진잠장터 등의 여러 마을이 있다.
     방골은 방죽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의 지형이 방과 같이 생겼으므로 그렇게 부른다고 하며, 아랫방죽골과 위방죽골로 나뉘어진 방죽골은 방골 남쪽에 자리한 마을로 방축리(防築里)라고도 부르는데, 아랫방죽골 오른쪽에 방죽이 있으므로 그렇게 불렀고, 계방골은 예방들마을의 서쪽에 있는 마을로 달리 계방동(桂芳洞)이라고도 부른다.
     삼한이는 삼한(三閑) 혹은 삼안(三雁)이라고도 부르는 마을로, 방동저수지 기슭을 동쪽에 두고 그 물가에 자리한 마을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있어서 처음에는 산안이라 했다고 한다.
     한 때 사화(士禍)에 쫓긴 선비가 나무꾼이 되어 여기에 숨어 살다가 복권되어 조정으로 나아갈 때, 나무 지게를 벗어던지며 ‘조정인들 여기 삼한만 하랴.’ 하였다고 한다. 일을 하면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 일한이요, 물이 좋아 장수하니 이한이요, 듣기 싫고 보기 싫은 것 안 듣고 안 보니 삼한이라는 세 가지의 편안함이 있어 삼한이 되었다는 유래와 함께 산 좋고 물 좋고 인심이 좋아 삼한이라고 한다는 두 가지 유래가 함께 전한다. 그런가 하면 마을의 지형이 기러기 세 마리가 앉아 있는 형국이라 삼안(三雁)이라고 부른다는 다른 유래도 함께 전한다. 안삼한이는 삼한이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삼한이 안쪽에 있다하여 그렇게 부른다.  
     산샛골은 아랫방죽골 동쪽 엉고개 근처에 있는 마을로, 참샛골, 냉천동(冷泉洞), 산사리(山斜里)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산을 끼고 있어서 산새들이 많이 날아드는 마을이라 그렇게 불렀고, 또한 마을에는 찬샘이 있어서 티끌세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수양을 하기 위해 자주 찾았던 마을이라 찬샘골, 냉천동이라고도 불렀으며, 산 속에 들어앉은 마을이라 산샛골이라고도 불렀다.
     나뭇골은 목동(木洞)이라고도 부르는데, 방동의 남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샅골, 징개울, 주동, 선사골 마을들을 통틀어 일컫는다. 옛날에 나무 숲이 울창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샅골은 달리 큰동네라고도 하는데, 호남고속도로 왼쪽에 있는 큰 동네이기 때문이며, 징개울은 선사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 앞에 긴 개울이 있어 그렇게 부른 것이고, 주동은 샅골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주막거리라고도 부르는데, 일제강점기에 이곳에서 술과 떡을 파는 집이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선사골은 방죽골 마을 동쪽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는 신선의 묘자리가 있어 그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또한 신선들이 이곳에 와서 화장을 했다고 하여 선색골(仙色谷)이라고도 한다. 
     삿갓집은 두계천이 흘러와서 남쪽으로 물굽이를 돌리는 그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주막이 있었던 마을로 유명하다. 옛날 과거를 보기 위해 전라도와 경상도 그리고 충청도 이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던 세 선비가 이 삿갓집에서 함께 묵게 되었는데, 육각형으로 된 이 집에서 술을 마시고 여기서 친구로 사귄 것을 정표로 삼기 위해 삿갓 모양의 이 집을 삿갓집이라 불렀다고 한다. 
     예방동(豫防洞)은 방골 서쪽애 있는 마을이고, 새우내는 방동저수지 동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신천(新川)이라고도 하는데, 금곡천 동쪽 가에 있는 새로 된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새터말은 안삼한이 북쪽에 있는 마을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
     하세동은 세동 관암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가는골 주변으로 상세동, 중세동, 하세동이 조성되었는데 상세동과 중세동은 행정구역상 세동에 속하고, 하류에 마을이 형성된 하세동은 방동에 속하게 되었다. 
     잔잠장터는 방동의 위방죽골 남서쪽, 하세동의 동남쪽 들 아래에 두계천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약 100여 년 전에는 큰 시장이 섰던 마을로, 옛날 이웃 팥거리장(두마장)과 구별하기 위하여 진잠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 원내동(元內洞)
     원내동은 동쪽으로 서구 관저동, 봉곡동과 구계(區界)를 이루고, 남서쪽으로는 빈계산 줄기의 능선을 경계로 성북동과 접하고 있다. 또한 북쪽으로는 교촌동, 대정동과 접해 있다. 
     원내동은 옛날 진잠현청이 있었고, 대덕군 진잠면사무소가 있던 동네로 행정의 중심지였는데, 지금도 진잠동의 주민센터와 파출소, 우체국 등 주요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곳을 읍내 또는 내동이라고 불러 왔다. 그러나 1988년 대전시에 편입됨에 따라 서구에 있는 내동보다 더 역사가 깊어 이곳의 지명에다 원(元)자를 붙여 원내동이라 하였다.
     원내동에는 내동 이외에도 옥은동, 솔마루, 맘골, 방죽안, 풍굿재, 피촌말, 웃뜸 등의 마을이 있다.
     옥은동(玉隱洞)은 읍내의 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옥골(玉谷)이라고도 부르는 마을로, 구봉산 옥녀봉 아래에 있기 때문에 본래는 옥녀동(玉女洞)이라 했다. 그런데 당시 군수가 ‘계집 여(女)’자가 들어가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여 옥은동이라 명명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옛날 백옥(白玉)이 나온 산 아래에 마을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다. 솔마루는 읍내 북동쪽 낮은 산 아래를 끼고 있는 마을로 솔마루, 송촌(松村)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뒷산에 소나무가 무성하고 그 아래 마을이 있다고 해서 소나무 동산 마을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른 것이다. 
     맘골은 솔마루 동북쪽 들 건너에 있는 마을로, 심동(心洞)이라고도 부른다. 풍수설에 따르면 이곳은 와우형(臥牛形)의 명당이 있는데, 그 와우형의 염통에 해당하는 자리에 마을이 있다고 해서 마음골, 심동이라 부르다가 마음골이 변하여 맘골이 되었다고 한다. 방죽안은 옛날 충남방적 정문 오른쪽에 있던 마을이다. 충남방적이 들어서기 전에는 이곳에 방죽이 있었고, 그 안에 마을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충남방적도 도시개발에 밀려 사라졌다. 
     풍굿재는 읍내의 북동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마을의 지형이 마치 농기구인 풍구(풀무)를 닮았다고 해서 풍구재라 부르다가 변하여 풍굿재가 된 것이다. 피촌말은 진잠주민센터 동쪽에 자리한 마을로 옛날 백정이 살았던 마을이라 해서 피천말이라 불렀는데, 변햐여 피촌말이 되었다 한다. 웃뜸은 읍내의 들 건너 남서쪽 산장산 아래에 있는 마을인데, 지형상으로 위쪽에 자리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 교촌동(校村洞)
     교촌동은 동쪽에서 남쪽으로 원내동과 접해 있고 서북쪽으로는 빈계산의 능선을 경계로 성북동과 접하고 북쪽은 대정동과 인접하며, 이곳에 진잠향교가 있으므로 향교말 또는 교촌동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향교말, 칠성댕이, 돌샘골, 쌍암리, 새터말, 웃뜸, 아래뜸 등의 마을이 있다.
     향교말은 행골, 생교말, 생저말, 교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는 모두 향교가 자리한 마을이라는 뜻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칠성댕이는 향교말 북쪽에 당제를 지내던 북두칠성의 형상을 갖춘 바위가 있어 칠성당이라고 불러오다가 칠성댕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며, 돌샘골은 진잠초등학교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 안에 있는 돌샘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쌍암리는 칠성댕이 서쪽 호남고속도로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이름이 한자어로 쌍암리(雙岩里)인 것처럼 마을 앞에 바위 두 개가 쌍을 이루어 서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경지정리사업으로 이 바위들은 없어졌다. 
     새터말은 향교말 동북쪽으로 새로 들어선 마을이라 하여 새터말 혹은 신대(新垈)라 부르게 된 것이고, 웃뜸과 아래뜸은 칠성댕이 마을을 둘로 나눌 때 지대가 높은 서쪽 마을을 웃뜸이라 하고 동쪽 마을을 아래뜸이라고 부르고 있다.
  • 대정동(大井洞)
    대정동은 동쪽으로 서구 가수원동과 구계(區界)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빈계산의 능선을 경계로 성북동과 접해 있다. 남쪽으로는 교촌동, 원내동과 이웃하고 북쪽에는 계산동, 용계동이 인접해 있다. 
     마을 앞에 팽남샘, 한디샘의 두 큰 샘이 있고 마을 곳곳에 큰 우물이 있어 한우물이라 부르게 된 대정동에는 한우물 이외에 낡은한우물, 용머리, 양지골, 안산, 주암, 용부렝이, 씨아골, 강제, 당산말, 모가나무골, 백련당, 산정말, 궉말, 아래말, 원댕이, 시내집, 복산이, 버들개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다.
     낡은한우물은 한우물 너머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차츰 쇠퇴하여 지금은 아주 작은 마을이 되었다. 오래된 마을이라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마을 뒷산의 형상이 용머리같다고 하여 이름이 붙은 용머리는 한우물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유성-진잠간 도로인 유성대로에서 볼 때 오른쪽이 벌리고 있는 용의 입이고, 왼쪽이 용의 뿔이라고 한다. 이 용은 또한 용머리 마을의 서쪽인 성북동과 교촌동의 경계 산 날망에 있는 용바위에서 내려 왔다고 한다. 용머리의 앞쪽 길 건너에는 여의주봉도 있다. 
     양지골은 주암 남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부르는데 옛날에 여우, 늑대 등 산짐승이 들끓던 곳이라고 하며, 안산은 씨아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의 안산 밑에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어 그렇게 부르고, 주암(周岩)은 주루바위, 주리바위, 주리바우, 주애미라고도 부르는 마을로, 용머리 마을의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마을 둘레에 큰 바위가 있고 서남쪽에 주루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어 그리 부른다. 
     용부렝이는 씨아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고, 씨아골은 낡은한우물 북쪽 산등성이 너머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형국 즉 와우형이라 해서 소왓골, 쇗골이라 불러오다가 변햐여 씨아골이 된 것이다. 마을 아래 유계(柳溪) 또는 버들개라고도 부르던 냇물이 있어서 그 냇물 근처에 마을이 있었으나 홍수를 피하여 씨아골로 옮기면서 마을이 더 커졌다고 한다. 
     용머리 북쪽에 자리한 마을 강제(剛除)는 마을 근처의 흙이 삽도 안 들어갈 정도로 딱딱해서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제외시켰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당산(堂山)말은 주루바위 마을 서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옛날 산제를 지내던 산제당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모가나무골은 용머리 마을의 남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옛날 이곳에 모과나무가 많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백련당(白蓮堂)은 용머리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조선 중기의 학자 민재문이 이곳에 살면서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으며 백련당이란 정자를 짓고 세상을 소요하면서 자신의 호도 백련당이라 하였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고, 산정말은 모가나무골 마을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산의 높은 지대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두어 채의 집밖에 없다. 
     궉말은 한우물을 둘로 나누었을 때,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한우물의 구석에 자리해 있기 때문에 구석마을이라 했던 것인데 변하여 구억마을이 되고, 다시 음이 축약되어 궉말이 된 것이다. 아래말은 한우물을 둘로 나누었을 떼, 서쪽편의 마을을 가리키며, 원댕이는 한우물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소원성취를 비는 원당(願堂)이 있던 마을이라 그렇게 부르는데 사천 목씨 집성촌으로 원대정리라고도 한다. 
     시내집은 씨아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시내 옆에 자리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복산이는 대전교도소 북쪽에 있는 동네를 말하며, 버들개는 씨아골 아래에  있는 내로, 유계(柳溪)라고도 부른다. 앞 냇가에 버들이 많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 용계동(龍溪洞)
    용계동은 동쪽으로 서구 도안동과 구계(區界)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계산동, 학하동과 접해 있다. 남쪽으로는 대정동과 이웃해 있고, 북쪽으로는 상대동, 원신흥동과 인접해 있다.
    용계동에는 용계, 옥살미, 접수, 칼재울, 바바위, 산직말, 연암골, 밤고지, 뒤간모링이, 외딴집, 홍계 등의 마을이 있다.
    용계(龍溪)는 옥살미 서남쪽, 용계동을 지나는 호남고속도로와 유성대로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용계는 양지바른 곳의 마을 양달뜸과 음지에 속하는 음달뜸의 두 개 마을로 나뉘는데, 음달뜸의 뒷산이 용머리와 같다고 한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대정동의 용머리 마을에서는 용머리 마을의 살아있는 용에 밀려서 밀머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의 용은 죽은 용이라 한다. 용계동에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전한다.
    “접소란 마을에서 짐승을 잡아 옥살미 마을에서 올가미로 옭고 칼재울 마을에서 칼을 갈아
    밀머리 마을에서 밀어버려(잡아죽이다, 요리하다) 술안주 삼는다“
    옥살미는 용계동의 중심 마을로 칼재울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옥산(玉山)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마을이 옥토끼가 달을 쳐다보는 형국 즉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의 명당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접수(接水)는 칼재울 동쪽, 옥살미 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접우(接牛)라고도 부른다. 진잠천과 한내물이 합하는 지점에 있으므로 접수라 부르고, 이 근처에 소가 누운 형국, 즉 와우형(臥牛形)의 명당이 있으므로 그렇게 부른다고 하며, 칼재울은 용계동의 서남쪽, 흥도초등학교와 유성, 진잠의 경계에 자리한 마을인데, 도척리(刀尺里), 갈현(葛峴)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의 안쪽에 있는 박산에서 북쪽의 지형을 살펴보면, 칼재울 마을은 장수가 칼집에서 칼을 잡는 형국을 한 고개라 칼재울 혹은 도척이라 부르며, ‘칼’의 옛말이 ‘갈’이기 때문에 ‘갈현’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바바위는 칼재울 서북쪽, 옥살미 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도참설에 따르면, 마을이 있는 자리가 소가 누운 형국 즉 와우형의 명당에 따른, 바(참바)에 해당한다고 하여 바바위 또는 바바우라고 부른다.
    산직말은 칼재울 동쪽으로 옆에 있는 마을인데, 옛날 이곳에 산직(山直)이 집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고, 연암골은 산직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연암리(連岩里)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바위가 연하여 있는 곳에 마을이 있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밤고지는 밀머리의 양지뜸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밤나무가 이곳에 많았던 마을이라 밤곶이라고 부르다가 밤고지가 된 것이고, 뒤간모링이는 밤고지 북쪽으로 산너머에 있는 마을인데, 큰 기와집의 뒷간처럼 작은 마을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외딴집은 옥살미의 남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외따로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고, 흥계(興溪)는 칼재울 서북쪽, 명수대 동쪽에 있는 마을로 지금은 여러 차례의 수해로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매우 큰 규모의 마을이었다고 한다.
  • 학하동(鶴下洞)
    학하동은 동남쪽으로 용계동과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는 유성대로와 호남고속도로를 건너 계산동, 그리고 북쪽으로는 복룡동과 인접해 있다. 이곳의 마을로는 학하동, 별밭, 모덤말, 넉바위, 동산 등이 있다.
    학하동은 별밭 동북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마을의 지형이 마치 학이 내려 앉은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위쪽은 상전(上田), 중앙은 중전(中田), 아래쪽은 하전(下田)이라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별밭은 학하동 동산밑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성전(星田)이라고도 부른다. 학하동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통하는데 옛날부터 병화(兵禍)가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라는 도참설에서 나온 것이다. 별봉 밑에 마을이 있다 해서 별밭 또는 성전이라 부르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학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전재 임헌회(全齋 任憲晦)를 비롯한 유명한 학자들이 한 때 살았던 마을이다.
    모덤말은 넉바위 동쪽 마을에 큰 무덤처럼 생긴 돌무더기가 있기 때문에 무덤말, 무덤마루라 부르다가 모덤말로 변했는데, 회동(會洞)이라고도 부른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조씨라는 성을 가진 이가 처음 이주해 와서 개척한 마을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신라동, 신라촌이라고도 부른다. 넉바위는 별밭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에 달이 늦게 비취는 ‘늦바위’가 변한 넉바위가 있으므로 마을 이름으로도 부르는데, 덕암(德岩)이라고도 하며, 동산은 성전 북서쪽에 있는 동산(東山) 밑에 자리한 마을이라 그렇게 부른다.
  • 계산동(鷄山洞)
    계산동은 동쪽으로 학하동과 접해 있고 서남쪽으로는 빈계산을 경계로 성북동과 접해 있다. 남쪽으로는 대정동, 북쪽으로는 덕명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빈계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여 계산이라 붙여진 계산동에는 계산 마을 외에 원계산, 대장말, 노루정이, 동막골, 띠울, 사기막골, 차돌모랭이, 외딴집, 호산 등의 마을이 있다.
    원계산(元鷄山)은 동막골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이곳에서 가장 먼저 마을이 형성되어 계산동의 원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대장말은 사기막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대장간이 있었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 노루정이는 차돌맹이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뒷산의 형국이 노루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동막골은 계산마을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동막(東幕)이라고도 하는데, 빈계산의 줄기가 마을 앞에 장막을 두르듯이 뻗어 있는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부른다.
    띠울은 사기막골 옆으로 자리한 마을로 모곡(茅谷)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는 마을 근처에 띠(茅)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는 이곳의 띠를 베어 도롱이를 만들기도 했고, 멀리 서해안에서 겨울에 김을 뜨는 발을 만들기 위해 이곳에서 띠를 사가기도 했다고 한다. 사기막골은 동막골 남동쪽에 자리한 마을로, 옛날 사기를 굽던 그릇 가마와 그것을 파는 사기막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차돌모랭이는 원계산 서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학전(鶴田)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옆 산에 차돌이 많이 박혀 있다 해서 차돌모랭이라 부르며, 마을 뒷산의 형국이 마치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이라 하여 학전이라 부른다. 외딴집은 사기막골 동쪽에 외따로 떨어져 집이 몇 채 있어서 그렇게 부르고, 호산(虎山)은 동막골 남동쪽의 호랑이가 엎드린 형국을 한 호산(虎山)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 온천동(溫泉洞)
    온천동은 백제 때에는 노사지현(奴斯只縣)에 속했고, 통일신라 때에는 비풍군(比豊郡)의 영현(領縣)인 유성현에 속했다. 고려 때는 공주부에 속했고, 조선시대 초기에는 공주군 현내면(公州郡 縣內面)에 속했으며, 조선 말기인 1895년(고종32)에는 회덕군에 편입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유성면, 1973년에 유성읍 온천동이 되었다가 1983년에 유성출장소로 변경후 1989년 유성구 신설로 유성구 온천동이 되었다가 1998년 탄동과 온천 2동은 온천2동으로 통폐합되었다.
    옛날에 봉명동 갑천의 제방 아래에서 처음으로 온천수가 솟아나자 이를 개발하여 관광지가 되면서 이 일대를 온천동이라 불렀는데, 그 뒤 관광지로 인구가 점차 늘어나 온천동은 다시 온천1동과 온천2동으로 행정동이 나뉘어졌다.
    온천1동에는 봉명동, 구암동, 덕명동이 있고, 온천2동에는 장대동, 궁동, 어은동, 구성동, 그리고 죽동의 일부가 포함된다. 원신흥동과 상대동은 인구 증가로 온천동에서 분리되어 따로 원신흥동이 법정동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 봉명동(鳳鳴洞)
    봉명동은 유성온천의 중심지역으로 갑천을 구계로 하여 동쪽에는 서구 갈마동, 월평동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구암동, 남쪽으로는 상대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또 북쪽으로는 유성천을 경계로 장대동, 궁동, 어은동과 접해 있다.
    옛날에 숲이 우거져 부엉이가 찾아와 울던 지역이라 하여 봉명동(鳳鳴洞)이라 부르는 이 곳은 유성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으로 봉명동 외에 탕거리, 아래진터골, 수챔골, 용반 등의 마을이 있었다.
    탕거리는 용반 서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온천탕이 있으므로 그렇게 부르고, 아래진터골은 구암동의 진터벌 아래쪽에 자리한 마을로 백제 때 무왕이 군사를 주둔시켰고,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가 새로 도읍지를 정하고자 계룡산 신도안에 행차했을 때, 그의 아들 이방원이 군사를 주둔하고 훈련시켰던 곳이라 진터벌이라 했다고 한다.
    수챔골은 용반 북동쪽으로 서구와 유성구 사이에 걸쳐있는 다리인 만년교 서북쪽에 있던 마을이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오는 갑천이 봉명동 동남쪽에서 건천(乾川)을 합하여 수량이 부풀고는 북쪽으로 흘러가면서 물굽이를 꺽어 동북으로 흐르는 그 냇가 아래 마을이 있었다. 그래서 큰 비가 오면 강물이 넘쳐 마을이 자주 물난리를 친다 해서 수침말이라 불렀던 것인데 변하여 수챔말이라 했다. 지금 그린하우스건물 근처 제방 밑에 있던 마을이다.
    용반(龍盤)은 레전드호텔 서쪽, 계룡로 건너 들 한가운데 있었던 마을이다. 옛날에 이 마을에 있었던 둠벙에서 용이 승천하였다고 하는가 하면, 마을 한가운데 용이 서린 바위가 있어 그렇게 부른 것인데, 이곳은 본디 부자 마을이어서 원님의 수탈이 심한지라 ‘곯는 놈은 상대리 원님 때문에 용반놈만 곯는다’는 말이 전해온다. 지금은 서남부개발지역에 들어가 고층아파트가 들어섰다.
     
  • 구암동(九岩洞)
    구암동은 유성- 동학사간 도로인 현충로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봉명동, 남서와 북서쪽에는 덕명동과 갑동이 접해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노은동, 장대동이 이웃해 있다.
    거북이를 닮은 거북바위가 있어 구암(龜岩), 거북바위라 부르다가 뒤에 구암이라 고쳐 쓰게 되었는데, 구암동에는 원구암, 굴바위, 창말, 장바탱이, 궁말, 어랑이, 금박골, 진터벌, 옹기점골, 산제골, 방죽안, 들말 등의 마을이 있다.
    원구암(元龜岩)은 장바탱이 서남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구암 마을로 처음 생긴 마을이기 때문에 원구암이라 부르고, 굴바위는 창말 서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마을 남쪽에 있는 골짜기에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어 이 바위를 그렇게 부르는데, 그 바위 아래에 마을이 있다고 해서 마을 이름도 굴바위 또는 굴암(窟岩)이라고 부른다.
    창말은 굴바위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창촌(倉村)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조선시대 이곳에 사창(社倉)이 있었기 때문이며, 창바탱이는 구암 서북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점촌 장판동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이곳에 옹기점이 있다 하여 장바탱이 또는 점촌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장판동이라 했다.
    궁말은 창말 동쪽에 있는데 달리 궁리(宮里)라고도 부른다. 고려시대 이 지역에 있었던 유성현의 고을이었던 마을이라 그렇게 부르며, 어랑이는 궁말 동쪽 아래에 자리한 마을인데 으랑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의 지형이 오량집 아래 대들보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다가 뒤에 으랑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금박골은 원구암 서쪽에 자리한 마을로, 마을 서쪽, 왕가봉 중턱에 금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어 햇빛이 비치면 금빛으로 번쩍거려 마을까지 비춰 준다고 해서 금박골, 금뱃골이라고 부르며, 진터벌은 구암 남동쪽 벌판에 있는 마을인데, 백제와 조선시대 초기에 군사들이 진을 쳤던 터에 마을이 있어 그렇게 부르는데, 달리 진대평(陣垈坪)이라고도 한다. 옹기점골은 구암 남쪽에 옛날 옹기점이 있었던 마을로 옹기점터라고도 부르고, 산제골은 지금 유성생명과학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마을인데, 산제당(山祭堂)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방죽안은 궁말 아래에 방죽이 있었고, 그 안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지금은 방죽이 없어졌다. 들말은 창말 북쪽 넓은 들판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평촌(坪村)이라고도 한다.
     
  • 덕명동(德明洞)
    덕명동은 동북쪽에 구암동, 동남쪽에 복용동, 그리고 서쪽으로는 계룡산 줄기를 시계(市界)로 공주시 반포면과 경계를 이룬다. 또한 유성-삽재고개 정상간 도로인 현충로를 중심으로 북쪽에 갑동이 있고 남쪽에 계산동이 있다.
    마을과 주변에 돌멩이가 많다고 해서 돌멩이골이라 부르다가 덕명골, 덕명동이 되었다고 하며, 여기에는 화산, 노루쟁이, 바전이, 하들이라는 마을이 있다.
    화산은 노루쟁이의 서쪽에 자리한 덕명동에서 가장 큰 마을인데, 화산(華山)아래에 마을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노루쟁이는 화산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마을 남쪽의 산에 노루가 많았고, 그 산의 모양이 노루를 닮았다 하여 그렇게 부르며, 바전이는 하들의 북서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마을의 모양이 우리가 입는 바지와 같다고해서 바전이라 부른다고 하며, 하들은 화산 북동쪽에 자리한 마을로 마을 동쪽에 있는 들 이름이 하들이라 그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도 하들이라 했다.
  • 원신흥동(元新興洞)
    넓은 들판으로 둘러싸인 원신흥동은 갑천을 경계로 동쪽과 남쪽에 서구 월평동, 도안동이 접해 있고, 서쪽에는 상대동, 북쪽에는 봉명동이 인접해 있는데 현재 이곳은 모두 서남부권개발에 따라 신도시가 건설중에 있다.
    넓은 들판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신흥이라 부르던 마을인데, 1983년 대전시에 편입되면서 동구에 같은 동명을 가진 신흥동이 있어 그 동구(東區)의 신흥동보다 먼저 생긴 신흥동이라는 의미로 원(元)자를 붙여 원신흥동이라고 했다.
    이곳에는 원신흥동 이외에 문산, 양지덜레기, 음지덜레기, 고잿들, 참남배기 등의 마을이 있었는데 최근 서남부지역 도시개발로 모두 없어졌다.
    문산(文山)은 현재 대전 체육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산인 문산의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한 스님이 마을에 암자를 짓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친 마을이라 하여 문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과 이 마을에 문씨들이 살아서 문씨네의 산이라 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덜레기는 신흥 남쪽 들녘에 있었던 마을로 덕락리(德樂里)라고도 부른다. 들녘에 마을이 있어 들녘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들녘이, 덕락리라 부르는 마을이다. 이 덜레기는 두 개가 있는데 문산의 남쪽 양지바른 곳에 있던 마을을 양지덜레기, 양지덜레기의 남쪽 도안동으로 가는 산아래 음지쪽에 있던 마을을 음지덜레기라고 불렀다. 이 지역에는 다음과 같은 민요가 전해오고 있다.
    ‘문산에서 문을 열고 나와 덜랭이서 덜렁덜렁 걸어가다 음지덜레기에서 바라보니 도안에서 편안하게 쉬더라.’
    고잿들은 목원대학교 입구에 있는 흥도초등학교 북쪽에 있던 마을인데, 고잿들이라는 들 가운데에 있어 그렇게 부르고, 참남배기는 이곳에 참나무가 울창하여 큰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마을 이름인데, 신흥리 동남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옛날에 사람이 죽으면 이곳 참나무 위에 1년가량 얹어 놓았다가 시체가 마르면 장사를 지냈다는 전설이 있다.
  • 상대동(上垈洞)
    상대동은 넓은 들판을 사이로 동남쪽에 원신흥동, 동북쪽에 봉명동이 있고, 서쪽으로는 복룡동과 접해 있다. 그리고 건천을 사이로 남쪽에는 용계동과 남서쪽에 학하동, 북쪽에는 봉명동, 구암동이 이웃해 있다.
    상대동에 있는 마을로는 원골, 중동골, 상나뭇골, 산밑골, 양지말, 가운데뜸, 인삼촌 등이 있었는데, 최근 서남부권개발에 따라 고층 아파트 등 건물이 많이 들어서 도시화가 되었다.
    원골은 옛날 이곳을 지나가는 길이 험해서 나라에서 광도원(廣道院)이라는 원집을 두고 길손들을 쉬어가게 했다. 그 원집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원골이라 불러왔던 것인데 달리 원동(院洞)이라고도 부른다. 중동골은 상나무골 남쪽, 둥둥봉 아래골짜기에 있는 마을인데, 백제 때에는 노사지현의 고을이었다고 한다. 도참설에 따르면 어린이용이 구슬을 희롱한다는 유룡농주형(幼龍弄珠形)의 명당이 있다는 마을이다. 그 명당자리가 예로부터 원골과 양촌의 중간에 있다고 하였는데, 자세히는 중동마을 중동골 동쪽의 두간들 가운데 있는 묘 자리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설로는 중동골 51번지 근처라고도 하는데, 그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원골과 양지말 사이에 있다고 하여 중동골이라 부르고, 명당자리가 있다 하여 용촌(龍村)이라고도 부른다.
    상나뭇골은 중동골의 서북쪽에 있던 마을로, 옛날에는 이곳에 향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던 마을이라 상나무골 또는 향촌(香村)이라 불러오던 곳이다. 개발되기 전에는 몇 그루의 향나무가 마을에 있었다.
    산밑말은 중동골 서남쪽에 자리한 마을로,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불렀고, 양지말은 중동골 남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양지바른 곳에 있으므로 양지말, 양촌(陽村)이라고 부른다. 가운데뜸은 원골 한복판에 자리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고, 인삼촌(人蔘村)은 원골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마을 주변에 인삼을 재배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 복룡동(伏龍洞)
    복룡동은 동쪽에 상대동이 이웃해 있고 서쪽으로는 덕명동이 접해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건천을 경계로 하여 학하동, 계산동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구암동과 박산을 사이로 하고 있다.
    복룡동에는 복룡, 당산, 안말, 서성, 기은동, 드문다리, 건촌, 회방모리 등의 마을이 있다.
    복룡(伏龍)은 건촌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뒷산의 모양이 마치 용이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해서 복룡이라 부른다고 한다. 복룡의 서쪽에 있는 도덕봉, 백운봉, 금수봉, 빈계산, 관암산 등 높은 산을 통틀어 흑룡산(黑龍山)이라 부르는데 그 동쪽에서 계룡산의 맥이 들어가지 못하고 아래쪽으로 엎드려 있으므로 항상 대기만성인 명당이 있어 마을이 편안을 유지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당산(堂山)은 안말 서북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당산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그렇게 부른다. 산에는 산제당이 있어서 마을사람들이 산을 신성시 했다고 한다. 안말은 새터마을 북서쪽에 있는데, 복룡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박산(朴山)밑에 깊숙이 들어앉았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 서성(西城)은 본래 복룡 동남쪽 옛날 유성현의 고을이었던 마을 서쪽 산에 있는 성터를 가리켰는데, 그 아래쪽에 마을이 새로 들어서 있어 마을 이름도 서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마을이 다른 지역의 마을보다 늦게 들어섰다 하여 새터, 새터말이라고 불렀다.
    기은동(耆隱洞)은 복룡 안쪽 산 안에 깊숙이 들어 앉은 마을로 안말이라고도 부른다. 고령박씨네 산이라 하여 박산(朴山)이라 부르는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이 박산을 기은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호가 기은(耆隱)이므로 그의 호를 따서 산의 이름을 기은산이라 이르고, 그 아래 마을 안말도 산 이름을 따라 기은동이라 한 것이다. 그것은 박문수가 22세 때 그의 아버지 박항한(朴恒漢)과 어머니 경주이씨의 묘소를 이곳에 쓰고 한때 그곳에서 머물러 살았기에 그렇게 그의 호를 산 이름과 마을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드문다리는 건촌 서북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마을이 처음 생길 때 집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고, 건촌(乾村)은 기은동 남쪽 건천(乾川)가에 마을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회방모리는 당산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회판모리 또는 허판모리라고 부른다. 마을 뒤편에 회방모리라고 부르는 모롱이가 있어 그렇게 부른다.
     
  • 장대동(場垈洞)
    장대동은 유성천을 경계로 동남쪽에 봉명동, 남서쪽에 구암동과 접해 있으며, 서쪽에 노은동, 그리고 북동쪽에 궁동과 죽동이 인접해 있다.
    장대동에는 유성장이 서는 장터라 하여 붙여진 장대(場垈)외에 중봉, 동자미, 황촌, 꼭두배 등의 마을이 있다.
    중봉(中峰)은 장터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이 산언덕에 봉우리를 끼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동자미는 동자산(童子山)아래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동잠(東岑), 동자촌(童子村)이라 부른다. 도참설에 따르면 동자산은 신선 어린이가 꽃을 따는 형국인 선동채화형(仙童採花形)의 명당이 있다하여 동자산이라 했는데, 그 동자산의 우리말 표현인 동자뫼가 축약되어 동잠이 된 것이다.
    황촌(黃村)은 동자미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1950년 한국전쟁 때 피란을 온 황해도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이룩한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 이와는 달리 이 마을의 큰 길가에 계명상회라는 잡화점이 들어서서 계명촌이라고도 부르고, 꼭두배는 동자미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 궁동(弓洞)
    현재 충남대학교가 자리한 궁동은 과거 공동묘지였다. 이 궁동은 동쪽에 어은동이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유성-대덕연구단지간 도로인 유성대로를 경계로 하여 죽동과 접해 있다. 또한 남쪽과 남서쪽에는 봉명동과 장대동이 인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신성동과 접해 있다.
    마을 지형이 활처럼 생겨서 활골, 한자어로 궁동(弓洞)이라 붙여진 마을 외에 궁동에는 남작골, 장고개, 욧골모롱이, 집너머, 새동네 등이 있다.
    남작골은 장고개 북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남작곡(南鵲谷), 남작동(南作洞)이라고도 한다. 마을의 지형이 납작하여 까치집의 명당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장고개는 활골 서쪽 충남대학교 정문 앞쪽에 있는, 이 근처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었는데 장현(獐峴), 노루고개라고도 부른다. 풍수설에 따르면 이곳에 어린 노루가 어미를 쳐다보는 형국 즉 유장고모형(幼獐顧母形)의 명당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욧골모롱이는 장고개 동북쪽, 궁동 천주교 성당이 있는 마을인데 마을의 형국이 토끼모양이라 하여 묘골(卯谷)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욧골이라 하는가 하면 마을 남쪽에 펼쳐진 들이 욧골들이라 이 들이 모롱이에 자리하고 있어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집너머는 장고개 너머, 즉 봉암초등학교가 서있는 곳에 자리한 마을인데, 봉암(鳳岩) 또는 부엉바위라고도 부르며, 새동네는 장고개 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 어은동(魚隱洞)
    어은동은 충남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과 유성구청, 한빛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는 동네로 구성동의 서쪽, 궁동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유성천을 경계로 하여 남쪽에 봉명동과 접해 있고 신성동이 인접해 있다.
    어은동에는 은골을 비롯하여 삼계, 구수고개, 들말, 삼전, 영거리, 새말 등의 마을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유성구청, 한빛아파트, 어은초.중학교, 충남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과 과학기술원 일부가 자리하여 마을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은골은 영거리 서북쪽에 있던 마을인데 산골짜기에 마을이 있어서 은골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그 후 변하여 언골이라 부르기도 했다. 일설에는 유성천 가에 있던 이 마을은 겨울이면 언제나 꽁꽁 얼어서 언골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풍수설에 따르면 이 마을에는 고기잡이 노인이 물에서 낚시질을 한다는 어옹수조(漁翁水釣)형의 명당이 있다고 하여 어은(魚隱)이 되었다고도 한다. 삼계는 삼전이 동북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세 개의 계곡을 두고 그 사이에 마을이 자리해 있다고 하여 삼계(三溪)라고 부르며, 구수고개는 삼계 남쪽 고개 아래에 자리한 마을로, 지형이 구유(구수)와 같다고 하여 구수고개라 한 그 아래에 마을이 있어서 구수고개라고 부른다.
    들말은 영거리 북쪽 들말 들의 서남쪽 들 가운데 있던 마을이라 평촌(坪村)이라고도 이르는데 지금 유성구청 북쪽 한빛아파트 앞 동의 언저리이다. 삼전(三田)은 은골 북동쪽 충남대학교 농업생명대학 온실 뒤편에 있던 마을인데 삼전, 삼전이, 삼전리라고도 부른다. 좋은 경작지가 있어 삼전이라 부르다가 그 뒤 변하여 삼전이라 불렀다는 설과 마을이 삼전매화낙지(三田梅花落地)형국이라 하여 불렀다는 설이 함께 전한다. 영거리는 은골 남쪽 아래에 자리한 마을로 옛날에 잠시 약령시(藥令市)가 섰던 곳이라 약령(藥令)의 거리라 하여 영(令)거리라 부른다. 새말은 삼계마을 동쪽에 있던 마을인데 새로 생겼다 하여 신촌(新村)이라 하고 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동리(新東里)라고도 부른다.
     
  • 구성동(九城洞)
    구성동은 갑천을 경계로 동남쪽에 서구 월평동과 경계를 이루고, 남서쪽에서 서쪽으로는 어은동, 북쪽으로는 신성동과 접해 있다. 구억말 동쪽 거북성 산성이 있는 성두산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구성(龜城)이라 불렀다는 마을 이외에 구성동에는 구억말, 새터말, 송산, 새뜸, 윗말 등이 있었으나, 1970년대 이후 이곳에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들어섬으로써 마을들은 흔적이 없이 사라졌다.
    구억말은 성두산 서쪽으로 넓은 들을 앞에 하고 뒤쪽에 있던 마을을 가리키는데 구억말 또는 구억촌(九億村)이라고도 부른다. 한구석에 있다고 해서 구억말, 구억촌이라 한 이곳은 한 때는 구성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새터말은 성두산 북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인데, 달리 신촌(新村), 신대(新垈)라고 부르고, 송산(宋山)은 유다미산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다. 유다미산은 은진송씨네 산소가 있어 달리 송산이라고 부르는데, 그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마을이름을 유다미, 혹은 송산이라 불렀다.
    새뜸은 구억들 남쪽 마을인데 유다미 아래쪽 들 가운데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뜸이라 했고, 윗말은 구억말 위쪽으로 동북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그렇게 불렀다.
     
  • 갑동(甲洞)
    갑동은 현재 국립현충원이 자리한 동네로 동쪽으로 지족동, 서쪽으로는 계룡산의 한 줄기를 시계(市界)로 공주시 반포면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유성-삽재고개 정상간 도로인 현충원로를 경계로 하여 덕명동과 접해 있고, 반석동이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갑동에는 갑골, 원갑동, 장자터, 맷들, 평전말, 앉은바위, 점말, 송정리, 물방아양달 등의 마을이 있었다.
    갑골은 맷돌마을 북쪽에 있던 마을로, 향, 소, 부곡(鄕, 所, 部曲)에 따른 갑촌소(甲村所)가 있었던 마을이라 그렇게 불렀다. 원갑동(元甲洞)은 갑골 아래쪽에 자리했던 마을로, 갑골 일대의 마을에서 역사가 가장 깊은 마을이라 그렇게 불렀는데 아래쪽에 있다 하여 아래갑골이라고도 하였다. 장자터는 아래갑골 서쪽에 자리한 마을로, 옛날에 큰 부자가 살았다는 마을이라 그렇게 부르고, 맷들은 앉은바위 북쪽에 있던 마을인데, 매평(梅坪)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은 전에 황무지였으나 개척이 잘 되었던 마을이었다. 매화가 땅에 떨어지는 형국인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다고 해서 매들이라고 부르다가 맷들이 되었다. 또한 이 마을에는 덕명동에 있는 옥녀봉에 살던 옥녀가 손수 사용했던 맷돌이 날아와서 이곳에 떨어진 곳이라 하여 맷돌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맷들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평전말은 갑동 동북쪽으로 비교적 넓은 들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평전말 또는 평산전(坪田里)이라 불렀고, 앉은바위는 맷들 서남쪽, 즉 현충원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 초기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고자 공사 중일 때 왕자 이방원(뒤에 태종)이 앉아 쉬어간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점말은 송정리 북쪽 골짜기에 있던 마을인데, 옛날 마을에 사기점이 있었다 하여 점말, 점촌(店村)이라고 불렀다. 송정리(松亭里)는 점말 북쪽 골짜기 오양골에 있던 마을로, 마을에 소나무가 자라서 정자가 된 큰 반송이 있는 마을이라 송정리라 부른 것이다. 물방아양달은 앉은바위 서쪽에 자리한 마을로, 마을이 양지바른 곳에 있고, 또 마을에 물방앗간이 있었다고 하여 물방아양달이라 불렀다고 한다.
     
  • 죽동(竹洞)
    호남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죽동은 동쪽에 궁동, 서쪽과 남쪽은 지족천을 경계로 하여 지족동과 장대동에 접해 있다. 북쪽에는 하기동과 경계를 이룬다. 대나무가 울창하였기 때문에 대울 또는 죽동이라고 불렀다는 이곳에는 대울, 지울, 저평, 상피리, 새마을동네 등의 마을이 있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전개될 때 시범 마을로 지정된 선진마을이었다.
    대울은 지울 동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달리 죽동(竹洞)이라고도 부른다. 대나무가 우거진 산 아래 마을이 생기면서 그렇게 불렀다. 이곳을 박대울이라고도 부르는데, 반남박씨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대나무밭을 잘 가꾸었으므로 박씨가 대나무를 가꾼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다. 봉황은 죽순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울에서 죽순을 배불리 먹은 봉황은 봉명동에 나들이 갔다가 마음껏 울고는 다시 대울로 돌아온다고 한다. 봉황이 먹을 것을 마음껏 먹고 사는 대울은 그래서 옛날부터 부자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지울은 대울 서북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지률, 지동(芝洞)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긴 골짜기가 있어 그곳에 지초(芝草)가 많이 자라는 마을이라 그렇게 부른다. 저평(儲坪)은 지울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저들이, 저드리라고도 부르는데, 기름진 들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부르고, 상피리는 대울 남쪽 냇가 근처에 있는 마을이고, 새마을동네는 대울 동북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1970년대 새마을운동 이후 새로 생긴 마을이라 그렇게 부른다.
  • 노은동(老隱洞)
    노은동은 백제 때에는 노사지현(奴斯只縣)에 속했고, 신라 때에는 비풍군(比豊郡)의 영현(領縣)인 유성현(儒城縣)이었다. 고려 때는 공주부(公州府)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공주군에 속했으며 조선말기인 1895년(고종32)에는 공주군 현내면에 속했다.
    1914년 3월 총독부령 제111호로 행정구역 개편 때 수정리(水井里), 용의동(龍儀洞), 덕미동(德美洞), 소읍리(所邑里), 죽곡리(竹谷里)의 각 일부가 병합되어 노은리(老隱里)라 하고, 대전군 유성면에 편입되었었다. 1935년 11월 총독부령 제112호로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함에 따라 대덕군에 편입되었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3호로 유성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유성읍에 속했고, 1983년 8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로 대전시 중구에 편입되었으며, 1984년 9월 1일 대전시 조례 제1404호로 대전시 직할 유성출장소의 관할 아래 있다가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49호로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유성구에 속하게 되었고, 다시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89호로 직할시가 광역시로 개칭됨에 따라 대전광역시 유성구 노은동이 되었다가 2003년 2월 1일 유성구 조례 제593호로 행정동으로 노은동이 신설되고, 2007년 1월 5일 유성구 조례 제738호로 노은동이 다시 1.2동으로 분동되고, 최근 다시 노은2동은 노은 2.3동으로 분동되었다.
    왕가봉 아래 넓은 들에 마을이 생겨 논골이라 부르다가 노은골로 불러온 노은동(老隱洞)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적한 농촌에 지나지 않았다. 신도시의 개발로 급속히 인구가 늘어나 지금은 옛날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현재 노은 1동은 갑동, 죽동, 노은동과 장대동 일부 및 지족동 일부를 관할하고, 노은 2동은 지족동, 반석동, 수남동, 안산동, 외삼동과 하기동 일부를 관할하고 있으며, 노은 3동이 분동됨에 따라 반석동이 분할되어 관할하게 되었다.
    호남고속도로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노은동은 동쪽으로 장대동과 이웃해 있고, 서쪽으로는 갑동, 남쪽으로는 구암동과 유성-삽재고개 정상간 도로인 현충원로를 중심으로 접해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지족동과 접해 있다.
    넓은 들판이어 논골이라 부르던 이 곳에는 논골, 수정골, 덕미 등의 마을만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아파트와 학교, 그리고 공원과 상가로 변했다. 논골은 수정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었는데 논골, 노은골, 노은동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논이 많은 들에 자리해 있으므로 논골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다. 수정골은 덕미 남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수정곡(水井谷)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복판에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 또한 좋은 샘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부르며, 덕미는 논골 남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도미재, 도미티(道美峙)라고도 부른다. 덕산 또는 덕미라고 부르는 산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
  • 지족동(智足洞)
    지족동은 지족천을 경계로 동쪽에서 북쪽으로 죽동, 하기동, 반석동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갑동, 남쪽으로는 노은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산이 즐비하게 이어져 내려와 골짜기를 이룬 두메 지역으로 지족실, 지족동이라 부르는 이곳에는 지족골, 세미래, 가마골, 신촌, 은구비, 죽궁이, 창들, 통미거리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아파트단지로 변하였다.
    지족골은 가마골 남쪽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로, 편안함과 분수를 지켜 능히 넉넉함을 안다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마을이라 지족골, 지족실이라 불러왔다. 지족골을 중심으로 이곳에는 가마골 남쪽의 지족실과 세미래 남쪽의 공사실, 가마골 북서쪽의 소라실 등 세 개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하여 지관들이 수없이 찾아다녔으나 아직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세미래는 지족천 갈마산 서북쪽에 있던 마을인데 삼미천이라고도 한다. 냇가에 있는 마을로 냇물과 산과 들이 조화를 이루어 명당 터가 많다는 마을이다. 도참설에 따르면 큰 대지를 이루는 명당처가 아니라 작은 자리의 명당 터가 많으며, 그 명당 터마다 좌향을 잘 잡으면 자손들이 큰 영예를 얻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 뜻을 넓혀 이 근방을 열두 세미래라 부르지만, 사실은 이곳이 중심지가 된다는 것이다. 이곳은 인심이 좋고 땅이 비옥하고 물이 좋다 하여 세미래라고 부른다고 한다. 또한 일설에는 세미래, 안세미래, 그리고 반석동의 바깥세미래를 통틀어 삼미천(三美川), 세미래라고 부른다고 한다.
    가마골은 지족실 북쪽으로 가마동 산 밑에 있는 마을인데, 갈마동(渴馬洞)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실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 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옛날에 이곳에는 그릇을 굽는 가마터가 있었다 하여 가마골이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신촌(新村)은 세미래 안쪽으로 새로 생긴 마을을 이르는데, 세미래 안쪽에 있다 하여 안세미래라고도 부르며, 은구비는 지족실 동남쪽에 은구비, 은동(隱洞)이라 부르는 마을이다. 골짜기에 있는 이 마을은 옛날부터 벼슬길을 멀리 한 인사들이 자리를 정하기 위하여 많이 찾아왔던 곳이다. 그래서 은구비는 선비의 마을로 소문났는데 산막으로부터 시작한 마을로 선사박물관이 자리한 곳을 가리킨다.
    죽궁이는 지족실 서남쪽에 있던 마을인데 죽궁 또는 죽곡리(竹谷里)라 부른다. 마을이 생기기 전부터 대나무가 울창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이고, 창들은 죽궁이 동남쪽 들 가운데에 있는 마을을 가리키는데 달리 창평(倉坪)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사창(社倉)이 있던 마을이다. 통미거리는 가마골 북서쪽에 있던 마을인데, 이곳을 통미거리, 통무걸이라 부른다. 마을 뒷산이 옛날의 물통 혹은 술통처럼 생긴 그 통뫼 아래 있다 해서 통뫼곁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통미거리가 된 것이다.
  • 반석동(盤石洞)
    반석동은 남으로 지족동, 동으로는 외삼동, 북으로는 안산동과 인접해 있고, 서북으로는 공주시 반포면과 우산봉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다. 예로부터 마을과 주변의 산에 반석이 많이 깔려 있어 반석동이라 부르는 이곳에는 반석, 회병골, 욧골모롱이, 휴영이, 양지말, 홈골, 노래골, 우미동 등의 마을이 있다.
    반석(盤石)은 양지말 동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마을 주변에 반석이 많이 깔려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회병골은 반석 동쪽에 자리한 마을로 마을을 싸고 있는 뒷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 욧골모롱이는 반석 서쪽에 있는 욧골 골짜기 모퉁이에 마을이 있다 해서 그렇게 부르고, 휴영이는 회병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달리 금성(金城)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지형이 휘어져 들어간 곳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어 후영이, 휴영이라 부르고, 주변을 두른 산이 마치 성(城)과 같다고 하여 좋은 성안 마을이라 하여 금성이라 부른다.
    양지말은 반석 서쪽에 자리한 마을로 양지편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이 남향이어서 햇빛이 잘 드는 마을이라 그렇게 부른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 이 근방에 큰 비가 오고 있는데 이곳만이 햇빛이 나서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일을 하였다고 한다. 홈골은 휴영이 서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홈골, 홈바위라고 부른다. 바위에 홈이 파여서 그곳으로 물이 흐르는 바위가 마을 옆에 있으므로 그 바위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홈골 위쪽에 마을이 또 하나 있어 이를 웃홈골이라 부른다.
    노래골은 반석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윤씨의 성을 가진 농부가 민요를 잘 불러서 여기저기 두레를 할 때마다 불려 다녔다고 한다. 그가 노래를 부르면 두레를 하는 농민들이 피로를 잊고 일을 하여 유명한 노랫꾼이라고 불렀다. 그 윤씨가 사는 동네라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우미동(牛尾洞)은 홈골 서남쪽 우산봉 아래에 있는 마을로 반석동의 끝에 자리하고 있다. 우산봉 아래에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의 와우형(臥牛形)명당이 있다고 하는데 그 누워있는 소의 꼬리 부분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우미동이라 불렀다고 하나 지금은 군사시설인 군수사령부가 들어서서 주민들은 모두 타지로 나갔다.
     
  • 수남동(水南洞)
    수남동은 동쪽으로 신봉동, 추목동과 서쪽으로는 안산동과 접해 있다. 남쪽으로는 외삼동과 북쪽으로는 세종시 대평리와 접하고 있다. 뒤에는 높은 금병산이 둘러 있고, 물이 남쪽으로 흐르므로 무나미, 무남리 또는 수남이라고 불렀던 이곳에는 무나미, 홈골, 새재, 박산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1970년대 이후 군사 연구시설이 들어와 있어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무나미는 홈골 동북쪽에 있던 마을인데 마을 뒤에는 높은 금병산이 둘러 있고, 마을 근처를 통과하여 물이 흐르므로 무나미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홈골은 무나미 서남쪽에 있던 마을인데, 이 홈골에는 바위에 길게 홈이 파인 홈바위가 있어 그 바위의 이름을 따 마을 이름도 홈골이라 했다고 하며, 새재는 무나미 서북쪽 깊은 산 속에 있던 마을로 달리 조성(鳥城), 또는조성리라고도 불렀는데, 그 새재 아래 마을이 있어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박산(朴山)은 무나미 서남쪽에 박산이라는 산 아래에 있던 마을이라 그렇게 불렀는데, 그 산은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의 산이라 박산이라 불렀던 것이다.
     
  • 안산동(案山洞)
    안산동은 동으로 수남동과 외삼동, 서로는 공주시 반포면과 접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반석동, 북으로는 세종시 대평리와 접하고 있다. 길마재 산 아래에 있으므로 안산이라 부르는 이곳애는 길마재, 원안산, 진정이, 작골, 동촌, 소샛들, 어둔이 등의 마을이 있다.
    길마재는 높이가 197m의 말안장처럼 생긴 산인데 그 산 아래에 마을이 있다고 해서 부르는 마을이고, 원안산(元案山)은 진정이 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안산의 원 마을이라 그렇게 부른다. 진정이는 원안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진정리(眞亭里)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들어선 지역이 마치 수려한 정자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작골은 어두니 동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작곡(鵲谷)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서쪽에 있는 산에는 봉우리가 셋이 있는데 모두가 까치집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촌(東村)은 어두니 동쪽으로 들 건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불러왔고, 소샛들은 안산동 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옛날에 논이나 밭을 만들 수 없는 자갈밭이라 소샛들이라는 이름이 붙은 들의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고 그렇게 불렀다. 어둔이는 작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어둑운리(魚得雲里)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골짜기에 있고 서남쪽으로는 573m 높이의 우산봉이 있어서 항상 침침하다 하여 어두니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 마을은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여 항시 침침하진 않다. 일설에는 물고기 비늘같은 구름이 아름답게 지나는 마을이라 어득운리라 부른다고도 한다.
  • 외삼동(外三洞)
    외삼동은 서쪽으로는 대전-세종시간 국도인 북유성로를 경계로 반석동과 접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하기동, 동으로는 신봉동, 북으로는 박산을 경계로 하여 수남동과 접하고 있다.
    세미래 바깥쪽에 있어 바깥세미래라 하여 외삼동으로 불리는 이곳에는 바깥세미래, 큰말, 안말, 서당골, 산막, 학교말 등의 마을이 있는 한적한 전원 풍경이 남아 있는 지역이며, 지금은 한쪽에 대전지하철의 종점기지가 들어와 있어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했다.
    바깥세미래는 세미래(삼미천) 바깥쪽에 마을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큰말은 학교말 동쪽에 있는 바깥세미래의 큰 마을을 가리키는데 대촌(大村)이라고도 부른다. 세도가 당당한 은진송씨 집안의 재실이 있는 마을로 근동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안말은 사막 동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산 안에 마을이 있으므로 안말 혹은 내촌(內村)이라 부르고, 서당골은 바깥세미래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서당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
    산막은 학교말 동남쪽 골짜기에 엣날 산막이 있던 마을이라 산막 또는 산말이라고 부른다. 군사보호지역으로 묶인 지역으로 ‘한화공장’이 들어서서 주변이 완전히 변했다. 학교말은 서당골 서남쪽 길 건너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에 외삼초등학교가 있어 학교말, 학교촌이라 부른다.
  • 신성동(新城洞)
    신성동은 백제 때에는 소비포현(所比浦縣), 신라 때에는 적오현(赤烏縣)에 속했으며, 고려 초기에는 덕진현(德津縣)의 지역이었으나, 뒤에 공주부(公州府)에 속했고, 조선 초기에는 공주군 탄동면 지역이었다. 1895년(고종32)에 회덕군 탄동면에 속하게 되고, 1908년에 탄동면 소재지가 되었다.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행정구역 개편 때 대전군 탄동면이 되었고, 1935년 11월 1일 총독부령 제112호로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덕군에 속했다.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49호로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유성구 신성동에 속하게 되었고, 1990년 6월 1일 유성구 조례 제124호로 추목동, 자운동, 신봉동을 편입하였으며,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89호로 대전직할시가 광역시로 개칭됨에 따라 유성구 신성동이 되었다.
    유성구 동북쪽 대덕연구단지가 자리한 신성동은 신성동, 가정동, 도룡동, 장동, 방현동, 화암동, 덕진동, 하기동, 추목동, 자운동, 신봉동 등 11개의 법정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다.
    유성의 동북쪽에 자리한 신성동은 동쪽으로 전민동과 이웃해 있고 서쪽으로는 지족동, 반석동과 서북으로는 외삼동과 이웃해 있고, 남쪽으로는 온천2동과 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구즉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신성동에는 신성이, 숯골, 각장골, 승적골, 주막거리, 장방촌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1970년대 이후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옛 마을들은 없어졌다.
    신성이는 숯골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신성(新城) 또는 성동(聖洞)이라고도 한다. 마을 산이 성처럼 두른 지역에 새로 마을이 들어섰다 하여 신성이라 부르다가 신성, 성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숯골은 신성마을 남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탄동(炭洞)에는 추목동의 숯골과 신성동의 숯골 등 두 개의 숯골이 있다. 추목동의 숯골은 일명 본동(本洞), 탄동(炭洞)이라고 부르지만, 신성동의 숯골은 숙동(淑洞)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 숯을 많이 구웠던 마을이라 숯골이라 부른다. 확실치는 않으나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조선 광해군때의 지조 높은 학자이자 문장가인 상촌 신흠(象村 申欽)이 파직되어 김포에 내려가 살 때 소식없이 자취를 감추고는 어렸을 때 자란 주안향(周岸鄕), 지금의 동구 비룡동에 나타났다가 다시 소식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그때 그가 이곳에서 숯을 구웠다고 한다. 그 뒤 다시 그에게 죄가 더욱 무거워져 유배길에 오르게 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이 마을 사람들이 듣고, 감쪽같이 숯쟁이로 변장을 하여 일에 충실한 상촌의 품격을 높이 사서 마을 이름을 숙동(淑洞)이라 부르며 자랑했다고 한다.
    각장골은 아랫말 동쪽에 있던 마을인데 마을의 지형이 소의 뿔처럼 생겼다 하여 ‘뿔 각(角)’자를 붙여 그렇게 불렀다고 하며, 승적골은 신성 서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엣날에 이곳에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말에, 한 때 이곳에는 도둑의 행패가 심했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의 절에 사는 스님 하나가 도적들 속에 뛰어들어 교화함으로써 모두 선한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스님이 도적들을 깨우친 절이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도 승적골이라 한다.
    주막거리는 승적골 뒤쪽으로 큰 길이 있었던 큰 마을이었다고 하는데 그 마을에는 주막이 있어서 주막거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을이 커지면서 이곳에 면사무소가 옮겨와서 자리를 잡아서 1900년대 초기부터 1980년대까지는 탄동면 지역의 행정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장방촌은 신성동주민센터 남쪽으로 새로 생긴 마을을 가리킨다. 장동과 방현동에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자리를 옮겨 새로 세운 마을이다. 방현동의 장재울과 방현동의 방고개의 머릿글자를 따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 가정동(柯亭洞)
    가정동은 남으로 탄동천을 사이에 두고 구성동과 접하고 있으며, 동으로는 도룡동, 북으로는 장동, 서로는 신성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 가정동이다. 이곳에는 가정자, 노무새, 방아다리, 덕대골, 백산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 있어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가정자(柯亭子)는 노무새 동남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마을에 가정(柯亭)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 마을은 처음 강씨(姜氏) 성을 가진 사람이 개척하여 살았기 때문에 그 강씨의 이름이 가은이라 처음에는 가은이라고 부르다가, 가래나무가 자라서 정자를 이루므로 강정(姜亭)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가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믿기 어렵다. 가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 설득력을 지닌다. 노무새는 가정 서북쪽에 있던 마을인데, 옛날에는 마을과 그 부근에 나무새가 많이 있다고 해서 나무새라 부른던 마을이다. 그 뒤 변하여 노무새, 너무새라 부르고, 나무가 많은 아래쪽 마을이라 하초리(下草里)라고도 부른다. 방아다리는 덕대골 서쪽에 자리한 마을로, 마을 뒷산 모양이 방아다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노무새 위쪽에 있으므로 상초리(上草里)라고도 한다.
    덕대골은 방아다리 동남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옛날에는 이 마을에 숲이 우거졌다고 한다. 당시에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지 않고 섶으로 싸서 숲속 나무 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를 덕대라고 했다. 이 덕대가 있던 골짜기에 마을이 있어 덕대골이라 했다. 백산(白山)은 덕대골 북쪽 다름고개 동쪽 백산 골짜기에 있던 마을이다. 모래에 덮여 하얗게 보인다는 백산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그렇게 부른다.
  • 도룡동(道龍洞)
    도룡동은 가정동과 원촌동 사이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갑천을 끼고 있다. 특히 ‘93엑스포’현장이었기 때문에 이곳은 엑스포 과학공원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도룡, 경운리, 호동, 선창말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도시개발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도룡(道龍)은 부엉골 서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도롱, 도룡, 도룡리라고도 부른다. 마을 뒷산의 모양이 도룡뇽과 같다고 해서 도룡이라 부르는데 용에 관련된 산이 많은 지역이며, 인간이 수도한 모습을 그린 곤룡포(袞龍布)가 깔린 마을이라 하여 달리 용포리라고도 한다. 도룡의 원마을을 원도룡(元道龍)이라고 부르는데, 도룡과는 따로 마을이 있다. 경운리는 도룡 북쪽에 있는 마을로 산에 서리는 구름이 아름답고, 하나의 풍류를 이루는 마을이라 하여 경운(京雲)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경우니라고도 부르며, 호동(虎洞)은 도룡 북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부엉골이라고 부른다. 마을 뒷산의 모양이 호랑이를 닮았다 하여 호동이라 부르고 부엉바위가 있다 해서 부엉골이라 부른다.
    선창말은 도룡 남서쪽 갑천가에 새로 생긴 마을을 선창말이라 불렀는데, 때로는 상신리(上新里)라고도 한다. 마을에 선창(부두)이 있다고 해서 선창말이라 불렀다.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擇里志)]를 보면 ‘서해안에서 장삿배나 고깃배가 금강을 거슬러 갑천으로 들어와서는 한 포구에 소금이나 생선, 젓갈을 내려놓아 갑천들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들로 만들고 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그 장삿배나 고깃배,소금배가 갑천에서 짐을 풀던 포구가 바로 도룡동의 선창말이었던 것이다. 엑스포 과학공원의 조성으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장동(長洞)
    호남고속도로를 사이로 서북쪽에 자운동, 방현동과 경계를 이루고, 동으로는 화암동, 가정동과 경계를 이루며, 남서쪽으로는 신성동과 경계를 짓는 마을이 장동이다. 이곳에는 장재울, 새터, 정삼골, 황충미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대덕연구단지의 핵심 연구기관들이 들어서 있어 옛날의 마을은 찾을 길이 없다.
    장재울은 황충미 북쪽에 있던 마을인데 옛날에 이곳에 백씨라는 성을 가진 장자가 살았으므로 장자골, 장자울, 장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1979년경부터 대덕연구단지에 입주하는 각종 연구소가 들어서서 지금은 큰 길가에 몇 채의 집만 남아 있다. 새터는 황충미 남동쪽에 있던 마을인데, 새뜸, 신대(新垈)라고도 불렀다. 100여 년 전에 마을이 처음 생겨서 그렇게 불렀는데, 본래 이곳에는 산골로 개간이 되지 않은 들만 있었던 곳인데, 다른 곳에서 가난하게 살던 사람들이 한 집, 두 집 모여 들어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서 마을은 없어졌다.
    정삼골은 새터 동남쪽에 있던 마을로, 정상골, 정삼곡(政三谷)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는 정승이 세 사람 나올 명당자리가 있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으나 지금은 대덕연구단지의 화학연구원이 들어서서 마을이 없어졌다. 황충미는 장재울 남쪽에 메뚜기과에 속하는 벌레인 황충미(누리)의 모양을 닮은 황충미산 아래 마을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방현동(坊峴洞)
    방현동은 남으로는 호남고속도로와 대덕대교-신탄진간 도로인 과학공원로를 경계로 장동이 있으며, 동으로는 화암동, 북으로는 덕진동, 서로는 자운동이 이웃하고 있다. 이곳에는 재밑, 솔고개, 가양동, 내동, 새말, 드밭골, 돌매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자운대가 군사지역으로 편입되어 옛 모습은 흔적이 없이 사라졌다.
    재밑은 안말 동남쪽 덕진산성 밑에 있는 마을인데, 성본(城本)이라고도 부른다. 안말에서 솔고개 너머로 마을이 있다 해서 재밑이라 부르고, 덕진산성 아래 있는 본마을이라 하여 성본이라 부르는 마을이다. 마을이 처음 생겼을 때는 치곡(峙谷)이라 부르다가 뒤에 성본이라 부르게 되었다. 솔고개는 재밑 동남쪽에 자리한 마을로 달리 송현(松峴)이라고도 부른다. 소나무가 우거진 솔고개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그렇게 부른다.
    가양동은 새말 아래쪽에 생긴 마을로, 햇빛이 밝은 곳에 마을이 있다 해서 가양골, 가양동이라고 부르고, 내동(內洞)은 재밑 서북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덕진산성 안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안골, 내동이라 부르며, 방고개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방고개, 방아고개, 방현이라 부른다.
    새말은 안말 바깥쪽에 새로 생긴 마을로, 신촌(新村)이라고도 부르고, 드밭골은 안말 뒤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안말 뒤쪽에 마을이 있다 해서 뒷밭골이라 부르다가 변해서 드밭골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살던 사람들이 모두 안말로 옮기고 지금은 마을이 없어졌다. 돌매는 드밭골 뒤 산자락에 있는 마을인데, 동쪽 산에 있다 해서 동미라고 부르다가 변해서 돌매라고 부르고 있다.
     
  • 화암동(花岩洞)
    화암동은 동쪽으로 전민동과 접해 있고, 서쪽에는 방현동, 장동과 그리고 남쪽에는 가정동과 접해 있다. 또한 북으로는 관평동과 이웃하고 있다. 이곳의 마을로는 꽃바위, 설목이라는 두 개의 마을이 있다.
    꽃바위는 설목 서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화암(花岩)이라고도 한다. 도룡동에서 북으로 고개 너머 방현동으로 이어지는 길인 과학공원로 서쪽에 마을이 있다. 마을에 꽃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어 그렇게 부르고, 설목(雪目)은 꽃바위 동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마을이 처음 생길 때 설목(雪目)이란 사람이 살았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
     
  • 덕진동(德津洞)
    대덕대교에서 과학공원로를 따라 북쪽으로 호남고속도로를 지나 적오산성 아래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자리하고 있는 금병산 기슭이 덕진동이다. 동으로는 송강동과 서로는 추목동, 북으로는 구룡동, 남으로는 화암동과 접하고 있다. 고려시대 덕진(德津)고을이었던 것이 작은 마을로 줄어든 이곳에는 덕진과 향교골 마을이 있다.
    덕진(德津)은 향교골 동북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고려 때 이곳에 덕진현(德津縣)의 고을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향교골은 덕진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 때 덕진현의 향교가 서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불러오던 마을이다.
  • 하기동(下基洞)
    하기동은 대전-당진간 고속도로가 지나는 곳에 자리한 지역으로 동쪽에 신성동, 서쪽에는 외삼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으로는 죽동, 북으로는 신봉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텃골 아래에 있으므로 아래텃골이라고도 부르는 하기동에는 텃골, 아래텃골, 위텃골, 아래터, 송림, 노고텃골, 초숫골 등의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절반이 아파트 단지로 변하고 말았다. 텃골은 하기동의 전체 마을을 총칭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한 장자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텃세를 단단히 부려 외지 사람들이나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그의 땅은 밟지도 못하고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 그의 텃세가 대단했던 곳의 마을이라 하여 그때부터 텃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아래텃골은 위텃골 동남쪽 하기동을 지나는 호남고속도로 서쪽에 있는 마을로 텃골 아래쪽에 있다고 하여 그렇게 부르고, 위텃골은 아래텃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상기(上基)라고도 부른다. 아래터는 위텃골 도로 가에 있는 마을을 가리키는데, 큰 마을 아래쪽에 마을이 있다 해서 그렇게 부른다.
    송림(松林)은 위텃골 서남쪽에 자리한 마을로, 마을에 소나무가 울창하여 그렇게 부르고, 노고텃골은 위텃골의 동쪽에 있는 마을로, 노고텃골이라고 부르는 들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고 있는데, 느리들과 서근수들 사이에 있다. 초숫골은 송림마을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최숫골, 봉기(鳳基)라고도 부른다. 마을 북쪽에 옥토끼가 달을 쳐다보는 형국인 옥토망월형(玉免望月形)의 명당이 있다는 토끼울이라는 골짜기가 있고, 그 앞에 큰 못이 있던 마을이었다. 마을 앞 연못에는 이름을 모를 풀이 떠 있어 초수골(草水谷), 최쉿골이라 불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곳에는 부엉이가 유난히 많이 찾아와 우는 마을이라 하여 봉기(鳳基)라고도 부른다.
  • 추목동(秋木洞)
    서북으로 금병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세종시 대평리, 구룡동과 경계를 이루며, 남으로는 신봉동, 동으로는 덕진동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 추목동이다.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는 숯골, 우마장, 가는골, 원가는골, 가래울, 만선동, 선인동, 자선동, 천복동 등이 있다.
    숯골은 가래울 서쪽, 금병산 아래에 있는 마을인데, 숯골 이외에 탄동(炭洞) 그리고 본동(本洞)이라고 불렀었다. 본래 마을이 들어서기 전에 지금의 마을 주변과 산에 참나무가 많아서 숯가마부터 시작된 마을이라 한다. 숯가마와 함께 산막이 들어서고, 여기서 생산되는 숯의 화력이 좋아 숯을 지고 한양에 가서 팔아도 돈이 풍족하게 남았으므로 숯골마을은 차츰 번창하여갔다고 한다. 이 지역이 갑자기 번창하면서 면사무소가 들어서고, 그때부터 이 지역은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이라 본동(本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00년대로 접어들면서 교통상 벽지에 자리해 있으므로 탄동면사무소가 신성동으로 옮겨가서 쇠퇴하는 마을로 짐작했으나, 수운교(水雲敎)의 본당이 들어서면서 그 신도들이 모여들어 전국적으로 소문난 마을로 다시 부각되었다. 그 뒤 군사시설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옛 영화가 차츰 사라져가는 마을이 되었다.
    우마장(牛馬場)은 숯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1928년부터 1941년까지 이곳이 번창해갈 때 우마장을 두었다는 지역의 마을이라 그렇게 불렀다. 가는골은 숯골 동남쪽 금병산 아래에 자리한 마을인데, 세동(細洞)이라고도 부른다. 가는 골짜기에 마을이 있어서 가는골, 세동이라고 부르며, 가래울은 숯골 동쪽 금병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마을에 가래나무가 많아서 예로부터 가래울 또는 추목동(楸木洞)이라 불렀으며, 원가는골은 가는골 북쪽에 있던 마을인데 가는골의 원마을이라 그렇게 부른다.
    만선동(萬仙洞)은 숯골 동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1927년 수운교주 이상룡(李相龍)이 이곳에 수운교의 대법당인 천단(天壇)을 세우자, 여러 곳에서 신도들이 몰려와, 그 교인들이 마을을 세우면서 만선동이라 하였다. 선계(仙界)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선인동(仙人洞)은 숯골 북동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1927년 수운교 신도들이 세운 마을이고, 자선동(自仙洞)은 선인동 동쪽에 자리한 마을로 역시 수운교가 세워진 뒤 신도들이 스스로 세운 마을이며, 천복동(天福洞)은 숯골 서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교주 이상룡이 교인촌으로 세운 마을이다. 하늘나라의 복을 받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 자운동(自雲洞)
    동쪽에 장동, 서쪽에 신봉동, 남쪽에 신성동, 북쪽에 추목동이 이웃해 있는 곳이 자운동이다. 자운동, 느러리, 고내들, 밤나무정이, 호박골, 새뜸 등의 마을이 자운동에 있었으나 지금은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 마을은 없어졌다.
    자운동(自雲洞)은 추목동에서 남쪽으로 낮게 이어지는 잔산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다. 금병산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산줄기가 차츰 낮아져 이곳에 이르러서는 잔산이라는 산을 이루는데, 예로부터 동쪽으로 백운(白雲), 북쪽으로는 청운(靑雲), 남쪽으로는 자운(紫雲)의 삼운(三雲) 사이에 만인이 살만하다(三雲之間 可活萬人)는 명당이 있다고 했는데, 이곳이 바로 그 명당 마을이라는 것이다. 잔산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잔골, 자은동(慈恩洞)이라 부르고, 달리 자운동(自雲洞)이라 부르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집단으로 들어와 농사를 짓고 정착한 마을이기도 하다. 지금은 군사시설이 들어서 철거되었다.
    느러리는 자운동 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마을 앞에 선돌이 있었으므로 돌서니, 입석리(立石里)라고도 불렀다. 늘어진 잔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일반적으로 느러리, 느러니라고 불렀다. 고내들은 밤나무정이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옛날에 냇물부터 큰 물꼬를 내어 땅을 기름지게 한 마을이라, 물꼬를 낸 마을, 고내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밤나무정이는 느러리 남쪽으로 들 건너에 있던 마을로, 마을에 밤나무가 정자처럼 서 있었다 하여 율정(栗亭), 율촌(栗村)이라고도 불렀으며, 호박골은 밤나무정이 북쪽에 새로 들어선 마을인데, 오봉춧골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호박을 키우는 호박밭이 많아 그렇게 불렀고, 새뜸은 느러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신봉동(新峰洞)
    신봉동은 남쪽으로 하기동, 북쪽으로 추목동과 인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자운동, 서쪽으로는 수남동과 이웃해 있다. 신봉동에는 새울, 절골, 중방이, 알봉, 장대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없어졌다.
    새울은 장터마을 서쪽 높은 산에 가린 안쪽에 있던 마을인데 신봉(新峰)이라고도 부른다. 금병산 아래 마을이 있고, 높은 산이 둘러싼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깊은 골짜기에 마을이 새로 들어섰다 하여 그렇게 불렀다. 절골은 중방이 서남쪽에 있던 마을인데 달리 사동(寺洞)이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이곳에 절이 있어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고, 중방이는 새울 남쪽에 있던 마을로 중방리(中方里)라고도 부른다. 옛날 새울과 절골 사이에 마을이 새로 생겼기에 마을과 마을 사이 중간쯤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불렀다.
    알봉은 신봉동 동쪽에 자리한 산, 알봉 아래에 마을이 있어 알봉, 난봉(卵峰)이라 불렀던 마을이고, 장대(場垈)는 새울 동쪽의 들에 있는 마을로 장터라고도 한다. 1927년 수운교 법당이 세워지면서 수운교 신도들이 만선동, 선인동, 자선동, 천복동에 들어와 살면서 1928년에 장터가 생겨 1930년대에 번창했었다고 한다. 1940년대에 들어서서는 일제가 전쟁을 치르기 위하여 곡식에 대한 통제를 하고 물품이 궁핍해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여 1941년 문을 닫았다. 그 뒤 광복 후에도 장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장터가 임시로 섰으나 바로 없어졌다.
  • 전민동(田民洞)
    전민동은 백제 때에는 우술군(雨述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에 속했다. 고려 초기에는 회덕현(懷德縣)에 속했다가, 1018년(고려 현종9) 이후에는 공주부에 속했고, 조선시대 초기에는 회덕현에 속했다가 조선시대 말기인 1895년(고종 32)에는 회덕군 구즉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전군 구즉면이 되었다. 1935년 1월 1일 총독부령 제112호로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덕군에 편입되었고,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49호로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시 유성구 전민동이 되었고, 다시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89호로 직할시가 광역시로 개칭됨에 따라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이 되었다.
    행정동으로서의 전민동은 전민동, 문지동, 원촌동의 3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전민동의 본래 이름은 정민(貞民)이었다. 옛날 이곳에는 ‘곧은 백성들이 사는 마을’이란 뜻을 지닌 정민역(貞民驛)이 있어, 그 역은 삼남에서 서울을 오가는 교차로 역할을 했다. 1914년 정민이 변하여 전민으로 부른 것은 정민역이 없어지고 아마도 주민들이 이곳에다 밭을 일궈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곳에는 역벌을 비롯하여 산소등, 사장터, 감남골, 아랫말, 전촌 등의 마을이 있었다.
    역벌은 역원 터가 있던 청류동 아랫마을이다. 조선시대 여기를 지나던 역마가 하룻밤을 자면서 지나는 곳이라 하여 역벌이라 하였다. 산소등은 한일합섬이 자리한 건너편이 있는 광산김씨 허주공(虛舟公)의 산소가 이곳에 있다 하여 부르는데 그 산소 아래 후손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사장터는 태광산업이 들어선 자리와 고속도로 사이에 있었다. 이곳에 활을 쏘던 사장(射場)이 있었다 하며, 그곳에 마을이 있어 사장터라 부른다. 감남골은 마을에 감나무가 많이 있어 감나무골이라 하던 것이 감남골로 바뀐 것이며, 아랫말은 아래쪽에 마을이 있어 아랫말이라 한 것이다. 전촌(田村)은 전씨네가 살던 마을이라 하여 부르는 이름인데 현재 주민센터가 있는 마을을 가리킨다.
    전민동 산 18-1번지 산소골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충,효,열의 정려가 모두 한군데 있는 곳이다. 충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의 정려이고, 효는 서포 김만중의 효자 정려이며, 열녀의 정려는 김익겸의 어머니 연산서씨와 그의 손부이자 김진규의 부인인 영일정씨의 정려이다.
     
  • 문지동(文旨洞)
    문지동은 낮은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하여 ‘민마루’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사암 박순(思庵 朴淳)이 조상의 산소가 있는 이곳에 살았다고 하는데, 그때 글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고 해서 글월 문(文)자와 정상을 뜻하는 마루 지(旨)자를 따서 글의 으뜸 동네라는 의미로 마을 이름을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곳은 과거 신창노씨(新昌盧氏)와 충주박씨(忠州朴氏)의 집성촌이었는데, 지금은 연구단지 개발로 묘소들만 남고 주민들은 거의 흩어졌다. 최근 이곳에 대규모 아파트단지 건설이 진행되고 있다.
    이곳에 있었던 마을로는 서당골, 서낭당, 행결, 배거니, 가맛골 등이 있었다.
    글을 가르치던 서당이 있어 마을 이름을 서당골이라 했는데 위서당골과 아래서당골 그리고 바깥서당골 등 세 개의 마을로 나뉘어져 있었다.
    서낭당은 민마루 남쪽 큰 길가에 있었던 마을이다. 원래 서낭당은 자연스럽게 쌓아 올린 돌무더기 모양의 신앙 대상물로서, 마을의 안과 밖을 구분 짓거나 또는 마을과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가정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문지동에서는 예전에 실제로 큰 나무 아래에 서낭당이 존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서낭당’이란 이 마을의 이름은 이로 인해서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전에 민마루와 양촌이 합동으로 ‘서낭제’를 거행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서낭제는 민마루의 경우는 음력 정월 열나흩날에 지냈고, 양촌의 경우는 음력 정월 보름날에 지냈다고 하며, 이 제의를 통해 재앙으로부터 예방되고 마을이 무사태평하기를 빌었다고 한다.
    행결은 민마루 서쪽에 있는 마을로 행결산 밑에 있어 그렇게 불렀다. 살구나무가 많이 있는 산이라 행정(杏亭)이라 이름 지어 부르던 것이 변하여 뒤에 행절, 행결이라 불렀다고 한다.
    배거니는 옛날 이곳으로 갑천이 흘렀는데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만 되어, 배를 매달아 놓은 곳이라 하여 ‘배거니’라 불렀다고 한다. 즉 나룻배를 보내고 맞이하던 마을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가맛골은 민마루 북쪽에 있었던 마을인데, 예전에 그릇 가마를 굽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또한 마을 형국이 가마를 끌고 가는 말과 같다고 하여 가맛골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민마루에서 터널을 지나 도룡동으로 가기 전 왼편 골짜기를 승류골이라 한다. 문충공 사암 박순의 유허비와 사당이 있고, 이를 관리하는 집 한 채가 있다. ‘비풍에서 서쪽으로 오리가 되는 숭림동(崇林洞)’이란 구절로 보아 ‘숭림동’이 변하여 승류동이 된 것 같다.
  • 원촌동(院村洞)
    이곳에는 숭현서원(崇賢書院)이 있었으므로 서원말, 원촌, 원촌동이라고 부른다. 이 원촌동에는 서원말을 비롯하여 방죽골, 조팝나무골, 부모리 등의 마을이 있다.
    서원말(院村)은 이곳의 중심 마을로 원촌교 서쪽에 있는데, ‘선말’이라고도 한다. 숭현서원은 회덕 일대의 충절지사인 김정(金淨), 정광필(鄭光弼), 송인수(宋麟壽) 3현을 모시는 사우(祠宇)였다. 처음에는 중구 용두동에 세웠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이후 광해군 1년(1609) 송담(松潭) 송남수(宋枏壽)가 유생들을 모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 삼현서원(三賢書院)이라 하였고, 그해 유생들이 조정에 청액(請額)하여 “숭현(崇賢)“이라 사액(賜額)되었다. 뒤에 김장생, 송준길, 송시열을 추향(追享)하였고, 별사(別祠)에 이시직, 송시영을 배향하였다. 이 서원이 지역 학문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다가 1864년(고종 1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최근에 그 터에 다시 복원하였다.
    방죽골말은 마을 앞에 방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고, 조팝나무골은 조와 밤나무가 많이 있어 그렇게 부르는 마을이다. 부모리는 범허리라고도 하는데 마을이 범의 허리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장구통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그곳을 범허리라고도 한다.
  • 구즉동(九則洞)
    구즉동은 백제 때에는 우술군(雨述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에 소속되었다가, 고려 초기에는 공주부에 편입되었고, 조선시대에는 공주군 구즉면이었으며, 1895년(고종32)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회덕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전군 구즉면이 되었다. 1935년 1월 1일 총독부령 제112호로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덕군에 편입되었고,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49호로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되어 대전시 유성구 구즉동이 되었다가 다시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89호로 직할시가 광역시로 개칭됨에 따라 대전광역시 유성구 구즉동이 되었다.
    행정동 구즉동은 봉산동, 탑립동, 용산동, 관평동, 송강동, 금고동, 대동, 금탄동, 신동, 둔곡동, 구룡동 등 11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 봉산동(鳳山洞)
    봉산동은 구즉동주민센터가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동쪽으로는 대덕구 문평동과 갑천을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는 구룡동이 이웃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송강동, 북쪽으로는 금고동이 이웃해 있다.
    바위에 부엉이가 살았다고 하여 봉암(鳳岩)이라 부르는 산 아래 있다고 이름이 붙은 봉산동에는 바구니, 뷩바위, 청계뜸, 교촌 등의 마을이 있다.
    바구니는 오봉산(五峰山) 아래 자리한 마을인데 봉산동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구즉동주민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앞바구니와 뒷마구니로 나뉘는데 합쳐서 부를 때 바구니라 하고, 백운(白雲)이라고도 한다. 전하는 말에는 고려 때부터 박산소(撲山所)라는 행정단위인 소(所)가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넓은 들에 곡식이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이것을 관리하는 기관이 곧 이곳의 박산소였다고 한다. 오봉산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지금도 이곳의 지형은 바구니를 닮았다. 송강동 지역의 개발로 바구니 한쪽이 파손된 것 같지만, 틀림이 없는 바구니(바구리) 같다. 이처럼 지형이 바구니 같다 하여 바구니라 부르다가 그 뒤 도참설에 따라 금쟁반에 연꽃잎을 얹어 놓은 형국인 금반하엽형(金盤荷葉形)의 명당자리가 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경작에 따른 수확의 앞날이 밝은 지역이라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땅인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라는 설도 함께 전한다. 그 바구니의 앞쪽에 마을이 생기면서 이 마을을 앞바구니라 부르고, 뒤쪽에 생긴 마을은 뒷바구니라 부른다.
    뷩바위는 뒷바구니 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부엉바위가 마을에 있으므로 봉바위, 봉암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뷩바위라 부르게 된 것이다. 청계뜸은 앞바구니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시냇가에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부르고, 교촌(校村)은 앞바구니 안쪽 구즉초등학교가 자리한 북쪽에 있는 마을로 학교가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부른다.
  • 탑립동(塔立洞)
    탑립동은, 지금은 구즉동에 속한 법정동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구즉동 중 유일하게 회덕현에 속한 지역이었다. 이곳을 탑립동이라 부르게 된 것은 아랫말(下塔里)에 석탑(石塔)이 있었기 때문에 그 탑이 서 있는 지역이라 탑립리라 불러 왔던 것이다. 탑립 3구인 아랫말 산 104번지 김성곤 씨 집 앞에는 지금도 조그마한 돌탑이 있는데, 바로 이 자리에 옛날의 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탑립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한자어로 탑선동(榻仙洞)에서 비롯된다. 약 300년 전 관평동 동화울에 정착해 살았던 연안 김씨 족보에 의하면 탑립(塔立)이 탑선(榻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후자의 경우가 더욱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산의절, 오당골 등의 마을이 있었다. 산의절은 탑립 1통에 속하는 마을이다. 이 동네가 산의절이라 불린 것은 절이 있었기 때문인데, ‘의산(義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것은 의상대사가 세운 절이 있어서 ‘의상’이라고는 부르지 못하고 ‘의산’이라고 부르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당골은 연못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오당골이라 부른다. 그런가 하면 처음에는 집이 다섯 채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 용산동(龍山洞)
    용산동은 동북쪽으로 갑천을 경계로 대덕구와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관평동, 남쪽으로는 탑립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용산 밑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용산이라 부른 이곳에는 용산, 오룡이, 옹기뿌리, 두레샴골, 방아다리, 좌실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최근 대댁테크노밸리가 이 지역에 건설되면서 옛 마을은 모두 없어졌다.
    용산(龍山)은 옹기뿌리 남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산 모양이 용처럼 생겼다는 산 아래 자리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오룡이는 용산 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풍수설에 다섯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인 오룡쟁주형(五龍爭珠形)의 명당이 이곳에 있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옹기뿌리는 용산 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옹기를 굽고 파는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그렇게 불렀고, 두레샴골은 용산 동남쪽에 자리한 마을로, 마을에 두레박으로 물을 푸는 깊은 샘이 있어서 두레샴, 두레샘이라 불렀다고 한다.
    좌실은 용산 서쪽에 자리한 마을이고, 방아다리는 오룡의 북쪽에 있던 마을로 마치 디딜방아처럼 생긴 다리가 냇가에 걸쳐진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 관평동(官坪洞)
    관평동은 남쪽으로 화암동, 북쪽으로는 갑천을 사이에 두고 대덕구 와동과 경계를 이루며, 동쪽으로는 용산동, 서쪽으로는 송강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이 관청에 소속된 들이 있으므로 관들, 관평(官坪)이라 부르는 관평동에는 관평, 배울, 안터, 동화울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대덕테크노밸리의 부지와 아파트단지로 변했다.
    관평은 관평이라고 부르는 들에 마을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 본래 이곳 관평은 정민역(貞民驛)에 속한 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이 관평에는 위쪽에 있는 웃관평과 아래쪽에 있는 아래관평으로 나뉘었다.
    배울은 안터 동북쪽 골짜기에 있던 마을이다. 마을이 배가 가는 형국인 행주형(行舟形)이라 해서 배동네라는 뜻의 배울이 되었고, 안터는 동화울 서북쪽에 자리했던 마을인데, 약 150여 년 전에 안씨(安氏)가 처음 터를 잡아서 안기(安基), 안기리(安基里)라고도 부른다.
    동화울은 안터 동남쪽 관평천(官坪川)가에 자리한 마을인데 달리 동화동(東華洞)이라고도 부른다.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오는 관평천 물이 동쪽으로 물굽이를 돌리고 다시 동북으로 물굽이를 돌리는 지역에 마을이 자리해서 마을의 지형이 마치 동아와 같다고 해서 동화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약 350여 년 전에 연안 김씨 세형(世亨)이 처음 터를 잡고 살면서 들이 넓고 땅이 기름져서 살기 좋은 곳이라 동쪽에 꽃이 피는 동네라 하여 동화리(東花里)라 부르다가 뒤에 동화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송강동(松江洞)
    송강동은 동남쪽에 관평동, 용산동, 그리고 두리봉을 경계로 구룡동, 덕진동과 남서쪽에서 북서쪽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봉산동과 접해 있다. 소나무가 무성하여 송강이라 하였고, 그 앞 강물이 흐르는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송강이라 부르는 이곳에는 송강, 와룡, 배재기, 삼밭골 등의 마을이 있으나 지금은 거의 아파트단지로 변했다.
    송강(松江)은 삼밭골 서남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옛날에는 송강(松崗)이라 불렀다고 한다. 소나무가 무성한 산등성이에 있었던 마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는데, 지금은 송강(松江)이라 부르고 있다. 옛날 갑천이 이곳 산밑으로 흘러 강과 소나무가 잘 어울리는 곳에 마을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와룡(臥龍)은 배재기 북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마을의 지형이 마치 용이 누워 있는 것 같아 누울 와(臥)자를 붙여 와룡이라 불렀고, 배재기는 송강 남쪽에 자리한 마을로, 마을의 지형이 배가 가는 형국인 행주형(行舟形)이라 해서 주성(舟城)이라고도 부른다. 일설에는 배가 바다에 떠서 육중하게 서 있는 형국이라 이 마을에 자리를 잡으면 당대에는 어렵지만 재산이 후대에 와선 크게 모아진다고 해서 주성(舟城)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삼밭골은 송강 동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옛날에 삼밭이 있던 마을이라 그렇게 부른다.
  • 금고동(今古洞)
    금고동은 동쪽에 갑천을 경계로 충북 청원군 현도면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둔곡동, 신동과 이웃해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봉산동과, 북쪽으로는 신동의 일부와 금탄동에 접하고 있다. 금거북이 진흙에 빠지는 형국인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의 명당이 있어서 금구리(金龜里)가 변하여 금고동이 된 이 지역에는 원금고, 문주골, 작골, 방골, 안골, 족골, 산자뜸, 왯골, 새뜸 등의 마을이 있다.
    원금고(元今古)는 산자뜸 서북쪽 현재의 위생매립장이 자리한 마을인데 금고동의 원마을이라 그렇게 불렀다. 1994년도에 30여 호가 살았으나 모두 이주하였다. 문주골은 오얏골 서남쪽이 자리한 마을인데 옛날 한양에서 권좌에 올랐던 선비 한 사람이 권세를 버리고 이곳에 내려와서 책과 함께 살면서 세상사를 잊고 은거했던 마을이라 문주동, 문주골이라 부르다가 문줄골이라 부르고 있다. 작골은 안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작동(鵲洞)이라고도 하는데, 까치골 고개라는 이름의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부른다. 동쪽에는 갑천이 흐르고 서남쪽으로는 산이 둘러있어 산새, 물새, 들새들이 많이 모여드는 마을로 특히 길조로 불리는 까치가 많이 모여든다 하여 작골, 작동이라 불렀다. 1992년에는 12호의 작은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위생매립장이 들어서 마을이 없어졌다.
    방골은 안골 북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불로동(不老洞)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근처에 집이 넓게 펼쳐져 있는 마을이라 이 근처의 마을을 통틀어 열 두 방골이라고도 부른다. 마을과 마을 주변에 밤나무가 많으므로 밤골이라 부르다가 뒤에 방골이라 불렀다. 또한 장수하는 노인들이 많은 마을이므로 불로동이라고도 불렀다. 위생처리장이 들어서기 전인 1994년에는 50여 호가 산재해 있던 마을이었다. 안골은 원금고 동쪽 산 안쪽으로 아늑하게 자리해 있는 마을이다. 산 안에 마을이 있다고 해서 안골, 산 위쪽에 마을이 있다고 해서 상산동(上山洞)이라고도 부르던 마을이다. 위생매립장이 들어서기 전인 1994년에는 35가구에 150여 명이 살았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족골은 왯골 서남쪽으로 고개 아래 있는 마을인데, 마을의 지형이 소의 발처럼 생겼다 하여 족동(足洞)이라고도 부르고, 산자뜸은 족골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70여 년 전만 해도 사람이 살지 않는 새새뜸이란는 골짜기였다. 그 뒤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제상(祭床)에 올리는 산자를 만들어 파는 집이 늘어나면서 산자뜸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1994년도에 15호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다. 왯골은 산자뜸 북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옛날 이곳에 기와를 굽는 가마가 있어서 기와를 굽는 마을이라 하여 와동(瓦洞) 왯골이라 부르다가 오얏골, 애골이라 부르게 된 것이고, 새뜸은 원금고 서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
     
     
  • 대동(垈洞)
    대동은 동쪽으로는 갑천을 경계로 충북 청원군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신동과 접해 있다. 북서쪽에는 금탄동, 남쪽으로는 금고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큰 대밭이 있어 댓골, 대동, 죽전이라 부른다는 설과 집을 짓고 살기에 좋은 터가 있어 대동이라 불렀다는 이곳에는 댓골, 오대, 가마골, 학다리, 접밭, 배터 등의 마을이 있는데 대전에서 가장 개발이 안되어 원형이 잘 보존된 지역 중 하나이다.
    댓골은 가마골 북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대동(垈洞), 죽전(竹田)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는 옛날부터 큰 대나무 밭이 있어 대나무가 많은 동네라고 하여 댓골이라 부르다가 그 뒤 마을 앞에 들이 기름져서 살기 좋은 마을, 대나무 밭이 있는 마을이라 대동, 죽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댓골의 큰 마을을 큰댓골이라 부른다. 오대(五垈)는 가마골 남쪽으로 갑천을 동쪽으로 하고 서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옛날에 다섯 집이 마을에 들어와 땅을 일구고 살기 시작했던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
    가마골은 댓골 남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달리 가마동(加馬洞)이라고도 부른다. 옛날에는 이곳에 그릇을 굽는 가마가 있어서 가마골이라 불렀다고 하며, 또한 마을의 형국이 꼭 망아지를 닮았다 하여 가마동이라 부른다고 한다. 한편 전하는 말에는 그릇가마가 있어서 가마골이라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할 때 가마동(加馬洞)이라 했다고도 한다.
    학다리는 댓골 남쪽에 서당이 있던 마을인데 학교(鶴橋)라고도 부른다. 마을의 지형이 학의 다리처럼 생겼다 하여 학다리 학교라고 부른다. 접밭(蝶田)은 큰댓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 지형이 나비처럼 생겼다 해서 그렇게 부른다. 전해오는 말에는, 매화꽃이 땅에 떨어지는 형국인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는 매방산의 명당 터에서 사는 나비가 그 명당의 정기를 이곳까지 날라 주는 마을이라 이곳에도 명당 터가 있다는 것이다. 배터는 댓골 동쪽 말미께로 건너가는 나룻터 즉 배터에 작은 마을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 금탄동(金灘洞)
    구즉동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남쪽으로는 대동과 인접해 있고, 서남쪽으로는 신동과 이웃해 있다. 금강을 가로질러 북으로는 충북 청원군 부용면과 맞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세종시 금남면과 인접하고 있다. 금강의 여울이 있으므로 쇠여울이라 하는데 줄여서 쇠일, 금탄(金灘)이라 부르는 금탄동에서 유일한 마을이다.
    동네 뒷산의 일대에는 옛날부터 금이 많이 나서 조선시대부터 금을 캐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채광은 일제강점기까지 지속되었고, 지금도 금 채광의 흔적이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금점산이 그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한다. 또한 금점산 밑 강가에는 사금이 있어서 금을 채취할 수 있으나 양이 미미하다고 한다.
    금탄(金灘란) 지명에서 ‘금’은 애초에 쇠 금(金)자에 연원하고 있으며, ‘탄’은 ‘여울’이란 뜻을 나타내므로 한자어로는 ‘금탄’이라 적고, 부를 때에는 ‘쇠여울’이라 했다. 이 쇠여울이 줄어 ‘쇠일’이라 불리곤 한다. 다시 쇠여울은 대여울과 소여울로 나뉘어 불리기도 한다.
     
  • 신동(新洞)
    신동은 동북쪽으로 금고동과 금탄동, 남쪽으로는 둔곡동과 이웃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세종시 금남면과 북쪽으로는 금강을 사이에 두고 충북 청원군 부용면과 이웃하고 있다. 신동에는 녹골, 제집말, 가장골, 산지뜸, 새터, 양지편의 마을이 있다.
    녹골(鹿洞)은 양지편 서북쪽의 큰 마을을 가리키는데 마을의 지형이 사슴을 닮았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 일설에는 마을 뒷산 즉 소문산성이 있는 산에 사슴이 살았다 하여 녹동이라 부르고 녹골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녹골은 마을을 다시 세분하여 막배, 가장골, 산지뜸, 제집말로 부르기도 한다.
    제집말은 녹골로 들어가면서 오른편에 있는 마을인데 조선시대 말기에 부자인 이씨가 기와집으로 제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가장골은 녹골의 중심지가 되는 쪽의 마을인데 마을의 중심지역이지만 갓 쪽에 마을이 있어 그렇게 부른다. 산지뜸은 녹골의 제집말 서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산지에 마을이 있으므로 그렇게 부르며, 새터는 양지편 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새로 마을이 생겼다 하여 새터, 신대(新垈)라고 부른다.
    양지편은 동남쪽 녹골과 새터 사이에 자리한 마을인데 신흥(新興)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양지바른 곳에 자리해 있으므로 양지편이라 부르고, 새롭게 흥하는 마을이라 신흥이라 부른다.
     
  • 둔곡동(屯谷洞)
    둔곡동은 동쪽으로 금고동, 남쪽으로는 구룡동과 이웃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신동, 서쪽으로는 세종시 금남면 달전리와 이웃하고 있다. 이곳의 마을로는 두니실, 평전, 웃말, 새터골, 망월리, 덕진재, 용머리, 중고개, 중골 등의 마을이 있다. 두니실은 용머리 북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둔곡(屯谷)이라고도 부른다.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 부흥군이 우술성, 질티성, 진령성, 소문성을 비롯하여 탄현(炭峴)을 중심으로 지금의 한밭들 주위의 당시 산성에서 웅거하여 나당연합군과 싸울 때, 소문성에 웅거한 백제 부흥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신라의 장수 김인문(金仁問)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주둔하였던 곳이라 하여 둔곡이라 부르다가 이곳에 마을이 생기면서 두니실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마을의 역사가 1300여 년이 넘는다.
    평전(坪田)은 두니실과 북쪽의 중고개와의 사이에 있는 마을로, 마을이 밭 가운데 있으므로 그렇게 부르고, 웃말은 평전 남쪽 산비탈에 자리한 마을인데, 평전 위쪽에 있으므로 웃말, 상촌(上村)이라고 부른다. 새터골은 용머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새터(新垈)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하여 그렇게 부르며, 망월리(望月里)는 두니실 서쪽으로 삼성천 건너쪽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의 지형이 반달형이라 해서 그렇게 부르던 마을이다.
    덕진재는 두니실에서 서쪽으로 세종시 금남면 달전리로 가는 길 오른쪽에 있는 마을이다. 본래는 달전재라고 부르던 마을이었는데 두니실과 달전의 두 곳에 세거하는 창령 성씨들이 왕래하는 고개인 달전재를, 덕을 쌓은 사람들 즉 지조 있는 선비들이 넘어 다니는 고개라 하여 덕진재라 불렀다. 그 덕진재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라 마을 이름도 덕진재라 부르게 된 것이다.
    용머리는 두니실 남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마을 뒷산의 모양이 용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용머리, 용두리(龍頭里)라 부르는 것이다. 중고개는 두니실 서쪽에 자리한 마을로 달리 중현(中峴)이라고도 한다. 옛날에 둔곡동에서 유일한 절 백운사(白雲寺)가 있어서 그 절을 찾아가는 중들이 넘어다니던 고개라 하여 그렇게 불렀다는 이야기와 중이 고개를 끊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전하고, 중골은 새터골 동쪽 산 넘어 들인 지막골 남쪽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인데, 본래 사기그릇을 굽는 가마가 있어 사기막골, 정골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중골이 된 것이다.
  • 구룡동(九龍洞)
    구룡동은 동쪽으로 봉산동과 송강동, 남쪽으로는 덕진동, 추목동과 이웃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세종시 금남면과 북쪽으로는 둔곡동과 이웃하고 있다. 지형이 마치 구렁이 같다고 하여 붙여진 구룡동에는 구렁이, 청운동, 아랫들, 다리골, 사시미, 별락정, 등굴, 점골 등의 마을이 있다.
    구렁이는 청운동 동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구룡(九龍)이라고도 부른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옛날 햇빛이 쨍쨍한 한낮에 갑자기 빗줄기가 억수같이 쏟아지더니 수면으로 뻗어가기 시작하고 그 뻗어가는 빗줄기가 조그마한 연못에 머물렀다. 연못에 머문 물줄기가 이번에는 아홉 가닥으로 나눠지면서 그 연못에서 물줄기가 하늘로 이어지고는, 그 물줄기를 따라 구렁이(이무기)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 연못은 용방(龍坊)이어서 이 근처에서 100여 년 간 수도하던 구렁이가 연못을 통해 아홉 마리의 용으로 승천한 연못이 자리한 마을이라 구렁이, 구룡이라 부른다고 한다.
    청운동(靑雲洞)은 별락정 서남쪽으로 산을 넘어 있는 마을인데 남쪽으로 대곡티와 접한 그 북쪽에 자리해 있으며, 구룡소류지라는 작은 저수지가 가까이 있다. 동쪽과 서쪽, 남쪽으로 산이 둘러 있는 마을이다. 이곳 사람들은 처음 푸른 꿈을 품고 이곳에 들어와 안락지대(安樂地帶)에 살았다 하여 청운동리라 부른다고 한다. 도참설에 따르면 이곳은 청운(靑雲), 백운(白雲), 자운(紫雲)의 세 곳 사이에 가히 만인이 살만한 가활만인(可活萬人)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한국전쟁 당시에도 공산군을 모르고 살았다는 마을이 이곳이다.
    아랫들은 청운동 북쪽 들판에 있는 마을로 하평(下坪)이라고도 부른다. 청운동 아래 들판 가운데 마을이 있어 그렇게 불렀고, 다리골은 청운동 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월곡(月谷)이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밤이 되어 달이 뜨면 여기에 달이 제일 먼저 비친다고 해서 월곡이라 불렀고, 마을에 다리가 있어 다리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사시미는 다리골 서쪽, 별락정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지형이 사슴을 닮아서 사슴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사시미로 부르고 있다.
    별락정(別樂亭)은 다리골 서남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이곳에는 지형이 자라(鼈)라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 명당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이와는 달리 옛날 이곳에는 벼슬길에 나갈 것을 단념한 선비들이 별락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하던 마을이라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등굴은 청운동 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등골이라고도 부른다. 깊은 산골에 자리 잡은 마을인데 이 마을에는 등을 건 형국인 괘등형(掛燈形)의 명당이 있다고 해서 등골이라 부르며, 점골은 별락정 동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봉산동에서 구룡고개를 넘어가면서 첫 번째 마을이다. 고개 아래 마을이 있다고 해서 점이, 저미라고 부르다가 점골이라 부른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전개될 때 황소마을이라 불렀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