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의 역사문화

역사인물

유성의 역사인물

  • 1 우공
  • 2 홍석복
  • 3 김집
  • 4 조희일
  • 5 김반
  • 6 이유태
  • 7 송시도
  • 8 민광경
  • 9 김만중
  • 10 박문수
  • 박문수

    1635년 (인조 13) ~ 1720년 (숙종 46)

    유성구 복용동에 부모묘소

     

     조선시대 문신이다. 자는 성보이며 호는 기은이었다. 그리고 본관은 고령이다. 항한의 아들로 태어났다. 1723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후 사관이 되고, 이듬해 설서, 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 노론이 집권할 때 사직되었다. 그러나 1727년 에는 영조가 당재의 목적으로 정부의 대대적인 인사를 개편하는 사건이 일어나 다시 사서에 기용되었다.

     1728년 3월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오명항이 이인좌의 군대를 대승케 하는 데 대단한 공로를 세웠다. 이러한 그의 능력이 영조에 의하여 발탁되어 경상도 관찰사에 이르고 분무공신 2등으로 영성군에 봉해졌다. 1734년 진주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호조참판이 되었고 1737년 도승지,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듬해 다시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공이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이 탄핵되어 풍덕부사로 좌천당하였다. 그러나 1741년에는 어영대장을 거쳐 함경도 진휼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때 공이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 와서 기민을 구제하였기 때문에 공덕비가 세워졌다.

     그 후 병조판서를 역임했고 1743년에는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이듬해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45년에는 어영대장,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의 폐해를 논하다 충주목사로 다시 좌천되었다. 그 후 영남균세사를 거쳐 지성균관사, 판의금부사, 세손사부를 거쳤다. 그러나 1752년 왕세손이 죽자 약방제조로 책임을 추궁당해 제주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풀려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공은 특히 군정과 세정에 밝았고 특히 암행어사 때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충헌이다. 편서로서 탁지정례, 국혼정례 등이 있고 문집[기은집]이 있다. 한편 그의 글씨로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가 전하여 지고 있다. 묘소는 천안시 목천면에 있으나 그의 부모의 묘소는 유성구 복용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