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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전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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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덕군 유성읍 봉명리에 유성온천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성온천을 모르는 이는 별로 없겠지만 유성온천에 대한 전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여기 유성온천에 대한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백제말엽이었다. 이곳 유성 땅에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젊은이가 한사람 살고 있었다. 젊은이는 비록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모든 행실이 바르고 효성이 지극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다. 그는 결혼할 나이가 되었지만 늙은 홀어머니를 좀더 편안하게 모시기 위하여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결혼을 하면 식구가 늘어서 먹고살기가 더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럴 즈음에 백제는 신라를 쳐들어가 신라의 땅을 빼앗아 영토를 넓혀 나갔다. 영토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군사가 더욱 필요했다. 그래서 백제는 더 많은 군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나라안에 있는 젊은이는 모두 군대로 끌어들였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젊은이도 마침내는 군대에 나가게 되었다. 늙은 어머니는 울고 불며 7대 독자를 전쟁터에 보낼 수 없다고 몸부림쳤지만 나라에서 하는 일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의 아들은 마침내 군대에 끌려갔다. 그의 어머니는 이럴 줄 알았으면 빨리 장가라도 보낼 것을 잘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7대 독자를 전쟁터에 내보냈다가 죽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그 집은 대가 끊어지기 떄문이다. 젊은이의 어머니는 며칠간 밥도 먹지 않고 안타까워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만 어떻게 해서라도 전쟁터에서 살아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자기 아들이 살아서 돌아오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처럼 하느님께 빌기를 1년이 지났다. 하루라도 빠지면 아들이 죽을 것만 같아서 그는 비오는 날이나 눈오는 날이나 하루도 빼놓지않고 모든 정성을 다하여 빌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 사람들로부터 탄현성이 무너지고 백제가 망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믿어지지 않았다. 자기가 마을 앞으로 낯선 군대가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본 뒤에야 그는 백제가 망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젊은이의 어머니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들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런 어느 겨울날이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사립문 앞에서 해가 기울도록 서있던 젊은이의 어머니는 두 눈이 등잔만해졌다. 그처럼 기다리던 아들이 들길을 건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지 않는가. 젊은이의 어머니는 얼른 달려가서 아들을 부둥켜안았다. 그러나 아들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는 신라군의 포로가 되어 달아나려다가 붙잡혀 죽도록 얻어맞고 다시 도망쳐왔다는 것이었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도 멍든 자국이 시퍼렇게 보였다. 그러나 그는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만 해도 고마웠다. 그는 아들의 상처에 찜질을 하면서 아들이 빨리 낫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면서 그는 밤새도록 아들의 멍든 자국을 어루만지면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아들이 빨리 낫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밤사이 흰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산도 들도 모두 하얀 세상이 되었다. 젊은이의 어머니는 들판을 내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그때 어디선가 화살에 날개를 다친 학 한 마리가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면서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젊은이의 어머니는 학이 몹시 아프겠다고 생각하면서 학이 맴도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학은 목을 길게 빼고 애처롭게 울면서 벌판을 다시 한번 맴돌았다. 그러자 들판에 있는 눈이 맷방석만하게 갑자기 녹으며 웅덩이가 생겼다. 학은 며칠간 웅덩이에 앉았다 떴다하면서 뜨거운 물에 상처를 입은 날개를 적셨다. 그러자 학은 신기하게도 날개의 상처가 치료되어 기쁜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서남쪽으로 훨훨 날아갔다. 이것을 본 젊은이의 어머니는 아들을 웅덩이 속에 들어가게 하여 치료를 받게 하였다. 아들은 곧 나았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젊은이를 살리려고 그곳에 학이 날아오게 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을 학이 울은 곳이라고 해서 명학소라 부르고 학이 날아가 앉은 곳을 학하리라고 불렀다. 오늘날 봉명리는 바로 명학소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 유성구 원신흥동 덜레기마을(덕락동) 동북쪽 마을입구에 탑바위라고 하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원래 탑처럼 생긴 바위였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무너뜨려서 돌로 탑을 쌓았다고 한다. 이 탑바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지금의 신흥리에는 목씨들이 20여집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부자로 잘 살았는데 그것은 탑바위속에 살고 있는 한 쌍의 학이 목씨 집안을 돌보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줄도 모르는 그들은 늘 오만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인색했다. 더러 마을사람들이 양식을 꾸러 가면 그들은 온갖 거드름을 다 피우면서 양식을 꾸러온 사람을 내쫓았다. 그뿐만 아니라 다 른 사람들이야 죽든지 살든지 자기들만 잘 살면 그만 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마을 사람대로 이들과 거래하지 않으려고 했다. 어느 해였다. 봄부터 가뭄이 들기 시작하더니 가을이 다 가도록 가뭄이 들었다. 여름 내내 논과 밭이 타서 흉년이 들었다. 모두들 살아갈 길을 걱정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흉년이 들어 양식은 없는데다 어디서 쌀 한되라도 구할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디를 가나 한숨 짓는 소리였다. 마을 사람들은 밥을 먹는 사람들 보다 굶는 사람 들이 더 많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양식을 빌리러 가지 않았다. 그것은 목씨가 양식을 빌려주지 않으리란 것을 너무나 뻔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 마을에 중이 시주를 왔다. 중은 다른 집에는 가지않고 마을에서 제일 가는 부잣집에만 갔다. 중은 그 집주인이 인색하다는 소문도 듣지 못하였는지 대문 앞에서 근엄한 목소리로 염불을 외우면서 목탁을 두들기고 있었다. 이를 본 부잣집 주인은 이맛살을 찡그렸다. "당신은 무엇 하러 온 중이오?" 주인은 중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부처님께 시주를 좀 하십시오." "시주?" "네 그렇사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심술이 떠올랐는지 머슴을 불렀다. 머슴이 달려오자 외양간에 가서 두엄을 퍼 오도록 명령했다. 머슴은 주인의 말대로 삽에 쇠똥을 담아 가지고 왔다. "나는 이것 밖에 줄 것이 없으니 이것이나 받아 가시오." 주인은 머슴이 가지고 온 쇠똥을 중이 등에 짊어진 바랑 속에 담아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중은 눈 하나 움직이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염불을 외웠다. 이를 본 주인은 중을 대문 밖으로 내쫓고 대문을 잠가버렸다. "그대의 집은 탑바위 속에 있는 학이 도와주어서 잘 사는데 그 학을 날려보내면 모두 몰락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중은 안색이 변하여 가지고 대문 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주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들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마을 사람들의 인심은 더욱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중이 부잣집에서 쇠똥을 받아 가지고 쫓겨났다는 소문이 나서도 그랬지만 광속에 쌀을 잔뜩 쌓아놓고도 굶주리는 마을 사람들을 모른 체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어느날 부잣집에 양식을 꾸려갔던 어느 젊은이가 거절을 당하고 나와서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탑바위로 달려가서 탑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서 탑은 무너지고 그 속에 있던 학은 날개를 치면서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마리는 탑이 무너지면서 다리를 다치게 됐다. 그리하여 그 학은 얼마 날아가지 못하고 가까운 마을에 날아가 앉았다. 그래서 학이 앉았던 마을을 학마을이라고 부르고 다른 한 마리가 날아가 앉은 마을을 학하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부잣집은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점점 집안이 펴 나가면서 마을에서는 풍년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도 신흥리에는 커다란 바위 위에 돌들로 쌓여진 탑의 흔적이 옛날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 유성구 성북동에 가면 은진송씨열녀비정려가 있다. 성북동 마을에서 성북산성으로 넘어가는 길가 산모퉁이에 있는 이 정려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지금부터 약 200여년 전에 이곳 마을에 여철영이라는 사람이 살고있었다. 그는 넉넉한 살림이 아니기도 했지만 천성이 부지런한 사람이어서 쉴 틈 없이 일을 했다. 그렇게 하여도 풍족한 생활을 하기는 어려웠다. 여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낮에는 하루 종일 밭에 나가 곡식을 가꾸고 밤이되면 사랑방에서 짚신을 삼거나 새끼를 꼬든지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그가 마치 일을 하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 같이 보였다. 이처럼 부지런한데다가 용모도 준수하고 나무랄데가 없는 청년이었다. 거기다가 부모에게 효성도 지극한 사람이어서 마을에서 평판이 좋았다. 그런데 결혼을 못하고 있었다. 어디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웬일인지 중매가 들어오면 혼사가 다 이루어졌다가도 한쪽에서 반대하여 깨지고 하였다. 이쪽이 좋다고하면 저쪽에서 싫다고하고, 이쪽이 싫다하면 저쪽이 좋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인연이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어느 해였다. 이웃 마을에 사는 송씨 집안에서 중매가 들어왔다. 그처럼 이루어지지 않던 혼사가 단번에 이루어졌다. 은진송씨 집안에 아름답게 자란 처녀였다. 양쪽 집에서는 서둘러서 혼인식을 올렸다. 마을 사람들은 너무 잘 어울리는 신랑신부라고 하면서 연분을 따로 있는 것이라고 한마디씩 늘어놓았다. 여씨와 송씨는 정말로 다정한 한쌍의 원앙새 같았다. 남편되는 여씨는 부인 송씨에게서 눈 한번 떼는 일이 없었다. 아내가 하기 어려운 일을 할 때면 여씨는 달려가 아내를 도와주었고, 남편이 힘든 일을 할때면 아내 송씨가 달려가 남편이 하는 일을 거들었다. 그들은 집안에서 일을 할 때나 들에서 일을 할 때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함께 일을 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이 너무나 정답게 살아가니까 동네 사람들 가운데는 더러 시샘을 하는 이들도 있고 비아냥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둘은 정답게 살아가는 한쌍의 부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논에서 하루종일 일을 하고 돌아온 여씨가 한축을 하며 자리에 누웠다. 이마가 불덩어리 같았다. 송씨는 갑자기 당한 일이라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허둥대다가 의원을 불러왔다. 그러나 의원이 맥을 짚어보고 처방을 했는데도 별로 차도가 없었다. 송씨는 남편을 위하여 좋다는 것은 다 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송씨는 안타까웠다. 자기가 대신 아플 수만 있다면 남편 대신 자기가 앓아 눕고 싶었다. 송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남편 곁에서 시중을 들며 병간호를 했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였다. 남편 여씨는 그 뒤 며칠되지 않아서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송씨는 해가 까맣게 보이고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는 모두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송씨는 너무나 슬픈 나머지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넋이 빠져 나간 사람 같았다. 그런 송씨는 끝내 남편의 뒤를 따르기 위하여 목을 메어 자살을 하고 말았다. 송씨가 죽은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죽은지 닷새가 되는 여씨가 부시시 눈을 뜬 것이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며 왜 우느냐고 물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 하자 여씨는 통곡을 하고 말았다. 여씨에 의하면,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아내 송씨가 쫓아오더니, "여보! 당신이 가면 안 됩니다. 돌아가십시오." 하고 떠미는 바람에 여씨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그러나 송씨는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살아서 남편을 지극하게 사랑하던 송씨는 죽어서도 남편을 구하고 남편이 가야할 길을 자신이 대신 걸어간 것이었다. 여씨는 아내의 무덤을 양지쪽에 마련하고, 틈만 나면 무덤을 돌보면서 살았다. 그는 아내가 살았을 때나 마찬가지로 아내를 잊지 않고 사랑하였다. 이런 사실을 본 마을 사람들은 이 사람 입에서 저 사람 입으로 번져나가 마침내는 온나라에 퍼져 나갔다. 나라에서는 1804년 10월에 여철영의 부인 은진송씨에게 정려를 내렸다.

  • 신라 말의 고승인 도선국사는 이곳 별 밭에 머물면서 이곳을 추성낙지로 확인하였다. 즉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것이다. “도선비기”등을 저술하였으며 풍수지리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고려 태조왕건의 출생을 예언하였으며 왕건도 그를 추앙 하였다고한다.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은 40대 중반에 5년간 별 밭에 머물렀다. 이곳 별 밭에 학당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곳에서 학당을 짓고 가르치면 큰 인물이 나올 것 이라 하며 심은 향나무가 지금도 살아서 볼 수 있다. 제자에게 혼천의를 제작하게 하여 하늘과 별을 관측하며 성리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성리학은 우주의 섭리와 인간의 심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학문이다. 그 결과로 효종에게 기축봉사를 올릴 수 있었다. (기축봉사: 청나라에 대한 북벌정책등을 밀봉하여 효종에게 장계를 올림)

    탄허스님(1913~1983)은 조계종 승려로서 송시열이 강학하던 자리에 1969년 자광사를 세웠다. 현재 자광사 입구 마당에는 기둥의 받침돌이 있어서 우암 송시열이 강학했던 건물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국어학자 양주동도 탄허스님에게서 장자를 배우고 크게 탄복했다고 한다. 탄허스님은 기상이변과 핵전쟁등을 일찍부터 언급하였고 우리나라가 세계사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동양천문학회장 김구연선생은 어릴때부터 외계인과 우주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20대 초반에 학하동에 살면서 신비로운 체험을 하였다. 1950년대로 추정된다. 즉 한밤중에 느낌이 이상하여 눈을 떠보니 외계인이 방의 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에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인데 어찌 벽으로 들어오는가? 방문으로 다시 들어오라.”하니 외계인이“ 이런 일은 처음이다.”하며 문으로 다시 들어왔다. 외계인이 “이곳은 세상의 길지이니 이곳을 잘 보존하라. 내가 다시 이곳에 올 날이 있을 것이다.”하며 물러났다. 김구연 선생은 이후로 백마를 타고 다니며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구연 선생은 평생 천문학 연구를 하며 신성한 별봉을 지키며 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별궁(천명각)을 만들었다.

    학하동 멸왜뜰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침범하지 못한 곳 이라한다.

    별봉 남쪽으로 월봉이있고 거의 직선상으로 칠성당이 고인돌이 있다. 아래쪽으로는 대정동 한우물마을 고인돌에 별자리 모양 성혈이 차례로 위치하고 있어서 별봉을 중심으로 땅위에 하늘세계를 펼쳐 놓고있다. 지금도 별 밭에서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종종 볼 수있다.

    별밭마을 서북쪽으로는 빈계산, 금수봉, 도덕봉이 탄탄하게 마을을 감싸고있다. 빈계산과 도덕봉 사이의 수통골물은 사계절 끊이지 않으며 물고기들이 생명의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암탉을 닮았다는 빈계산 아래는 마한 신흔국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이다. 별밭의 동남쪽과 남서쪽은 넓은 들이 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살아온 지역이다. 진잠천과 갑천이 흘러간다.

  • 유성구 세동에 가면 한쪽으로 세워져 있는 바위가 여러 개 있는데 이 바위들을 아들바위라고 한다. 세동으로 시집온 여인네가 아들을 낳지 못할 때 정성을 다하여 치성을 드리면 그 치성에 따라 바위에 구멍이 뚫린 바위가 보인다고 하는데 그 구멍에다 작은 돌을 던져서 들어가면 아들을 얻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정성이 부족하거나 부정한 짓을 하거나 하면 백 년이 지나가도 구멍 뚫린 바위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백제때 진령이라 불리우는 진잠에 갔다가 세동을 찾으면 정감록의 기록에 의해 신도안이 도읍지가 되었을 때 그 도읍지의 동문터가 될 곳이라 지적하는 곳이 있다. 신도안이 도읍지가 되었다면 가장 중요한 문의 구실을 하는 동문이 진잠에 생긴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동문이 생길 자리에서 남산리 방향으로 한모퉁이쯤 돌아가다보면 큰바위가 여러 개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바위 중에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다고 하는데 이 바위를 보는 여인네는 아들을 얻을 수 있다하여 아들바위라고 한다. 그러나 이 아들바위는 바위틈에 끼여 있어서 정성이 지극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옛날에 정씨라는 사람이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면 큰 자리를 할 것이라는 말만을 듣고 황해도에서 전답을 모두 처분하고 아들 하나를 데리고 이곳 신도안으로 이사를 왔었다. 살아 생전에 재물은 노력을 하면 얻을 수 있는 일 같았으나 벼슬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정씨는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게 되면 동문쪽으로 많은 대감들이 드나들 터이니 그 쪽에 가서 자리를 정하고 있다가 재물을 탐내는 대감을 발견하여 바로 그 재물을 바치면 벼슬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관상쟁이의 말을 듣고서 부랴부랴 가산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그러나 삼십 고비에 이곳에 이사를 왔으나 오십 고비에 이르도록 신도안에 도읍은 정해지지 않고 늘 도읍지가 될 것이라는 소문만 무성하게 떠돌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도읍지가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아들 대에 기대를 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다음 손자 대까지 끈질기게 기다려보기로 작정을 하고는 아들 장가를 빨리 치르고 손자가 생기기를 어느 누구보다 몹시 기다렸다.
    그러나 아들이 장가를 간지가 몇 년이 지나도록 손자가 생기지 않았다. 해가 지나갈수록 며느리는 시아버지 눈치 보느라고 어쩔 줄을 몰랐으며 어떻게 하면 아이를 배태할 수 있을까 하고 고심고심 끝에 바위가 있는 산으로 가서 정성을 드리기로 하였다.
    며느리가 며칠 동안 바위 아래서 치성을 올리러 갔을 때 어느날 밤에 시아버지가 꿈을 꾸게 되었다. 꿈에는 곱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나타나서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였소. 그러나 댁의 며느리가 지성을 올리는 것은 개인의 영화를 얻기 위해서 그런 것이오. 댁이 꼭 손자를 얻고자 하는 소원을 이루어질지 모르나 손자가 대성한다는 보장은 없소. 꿈으로 보는 집을 대궐이라고 생각하시고 요긴하게 쓰실려고 땅에 묻어놓은 재물을 며느리가 지성을 올리는 있는 바위 아래에다 옮겨 놓으세요. 그렇게 하면 손자는 볼 수 있을 거요." 라며 선몽하고는 사라졌다.
    정씨는 아무도 모르게 파묻어 놓은 재물을 끄집어 내어서 며느리가 치성을 드리고 있는 바위 아래에 옮기라고 하는데 놀랐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어차피 알려진 재물의 소재였으므로 그날 밤 아무도 모르게 바위 부근의 땅을 파고 재물을 묻었다. 며느리는 지성을 드리러 다니다가 차츰 피곤한 기색을 보이더니 다리를 질질 끌고 다녔다. 그래도 자식을 얻으려는 욕심에서 밤을 새우며 치성을 드리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잠깐 자신도 모르게 합장을 한 채로 잠이 들었다. 그 사이에 꿈을 꾸게 되었다. 꿈에 곱게 차려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그대의 정성과 그대 시아버지의 정성도 대단하외다. 내일 아침 동이 트면 여기 바위 중에 구멍이 뚫린 바위가 보일 것이다. 그때 돌을 주워서 바위에 던져 그 돌이 바위 구멍 속으로 들어가면 아들을 얻을 것이고, 돌이 바위 구멍에 들어가지 않고 땅에 떨어지면 자식을 못 얻을 것이다."
    하고는 웃으면서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난 며느리는 동이 트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동이 트자 그녀는 구멍이 뚫린 바위를 찾았다. 한참만에 제자리에 돌아와서 구멍이 뚫린 바위를 찾고는 돌을 던졌다.
    돌은 떙그랑 하고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그 후 며느리는 열 달만에 아들을 낳았다.
    손자를 보게된 시아버지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밥상을 치우면 손자를 자기방에 데려오게 하고는
    "너는 큰 벼슬을 할 것이야. 네 벼슬자리는 할아버지가 마련해 놓았는걸…"
    하며 즐거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손자가 세 살 되던 해에 그만 병이 들어서 죽고 말았다. 그가 죽을 때 며느리에게 유언을 하기를
    "내 말 잘 들어라. 아이가 자라거든, 그리고 신도안에 도읍지가 생기거든 집 앞으로 드나드는 대감을 골라서… 재물은 바위에 바위에…"
    하고 죽었다. 재물은 바위에 바위에 하고 장소를 뚜렷하게 가르쳐주지 않았으므로 그 후 재물은 찾지 못하였다. 손자는 자라서 개경으로 가서 큰 벼슬을 하였다. 재물을 직접 전하지 않았더라도 땅속에서 재복을 타고 태어났으므로 큰 벼슬을 하였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 유성구 추목동 금병산 옥녀봉 중턱에 용이 되기 위해 승천을 기다리는 이무기가 셋이 지내고 있었다. 용의 하나는 청룡이었고, 하나는 흑룡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황룡이었는데 서로는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였다. 청룡과 흑룡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서로 물고 뜯으며 싸웠으며 황룡은 항상 그들의 싸움을 말리는 형편이었으나 늘 사이는 좋지 못하였다. 그들은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격렬한 싸움판이 벌어지곤 하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틀림없이 하늘에서 무슨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하늘을 쳐다보고 지냈지만 하늘에서는 항시 한줄기의 물줄기가 산봉우리 가까이에 내려왔다가는 다른 곳으로 갔다. 그때 흑룡은 생각을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는 자기의 승천을 바라는 것인데 강물을 좋아하는 청룡이 입에서 물을 뿜기 때문에 물이 흐려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싸움은 또 시작되었다. 그들의 싸움이 시작되자 금병산이 들썩거리고 황룡은 모르는 척하면서 굴 밖으로 나와보지도 않았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싸움은 여러 날 동안 끝나지가 않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싸워서 기진맥진 했던지 땅굴 속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이슬비가 내리다가 차츰 빗방울이 커지더니 하늘에서는 먹구름 소나기를 퍼붓기 시작했다. 황룡은 자기가 승천하여 용이 되겠다고 반가워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물줄기 끝에 천룡이 머리를 내밀더니 황룡에게 하는 말이 "땅속에 있는 두 놈을 끌고 오렸다" 하고 크게 호령을 하는 것이었다. 황룡은 땅굴 속으로 들어가 아직까지 싸우고 있는 청룡과 흑룡에게 어서 승천할 준비를 하라고 다그쳐서 굴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청룡과 흑룡은 너무 싸워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청룡은 이맛살을 찡그리면서 "어서 올라 타라"하고 호령을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승천하는 줄로 믿고 셋이서 똑같이 웃으면서 물줄기에 올라 탔는데 그들은 둥실둥실 하늘로 한참 올라가더니 서쪽 바다로 가는 것이었다. 한참있다가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치더니 그들은 서해바다로 낙하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물에 떨어져서 파도가 밀려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하늘에서 청룡이 나와서는 이렇게 외쳤다. "너희들 셋을 하늘에 부르기 위해 전당에 입문하는 굴을 주었고 너희들의 진정한 수도를 기다렸거늘 수도는커녕 매일 싸움질로 세월을 보냈으니 그대들은 미물만도 못하느니라. 그대들이 잠자리를 청했던 그 자리에는 다른 청룡, 흑룡, 황룡이 자리 잡았는지라 그대들은 갈곳이 없어졌노라. 그대들은 여기에서 해룡의 종이 되어 다시 천 년을 기다려야 하느니라. 즉 싸움은 넓은 바다 가운데서 마음껏 하여 보아라." 하고 사라져 버렸다. 승천을 못하고 바다에 버려진 그들은 지금도 바다에서 종노릇을 하고 있는데 그 후부터 용바위에서는 싸움이 끊어졌다 한다. 지금도 금병산에 가면 용이 살았던 굴이 셋이 있는데 지금도 그 안에 승천을 기다리는 이무기가 살아있다고 한다.

  • 유성구 봉산동에는 '큰 부시골' '작은 부시골'이라고 부르는 산이 있는데 큰 부시 골은 부싯돌을 팔아 부자가 된 박씨가 집을 지어 살게 된 봉우리를 일컫는 것이고 작은 부시골은 그가 정자를 지은 곳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 때 탐라에서 바닷일을 하던 부씨는 그 일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사람이 죽어도 육지에 가서 죽어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바다를 건너 살만한 곳을 찾아 금강을 거슬러 올라와 덕진이라는 곳에 정착하게 되었는다. 아기자기한 산이며 푸른 들이며 이곳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는 외지에서 온 처지라 남들보다 열심히 일을 하였고, 그래서 정착한지 3년만에 아내를 맞이하게 되어 사십이 되어서는 기와집을 지어 풍요롭게 살게 되었다. 다섯명의 머슴을 둘 만큼 재산도 많았다.
    그러던 중 하루는 남루한 옷을 입은 한 총각이 집을 찾아와서 머슴으로 써 달라고 했다. 부씨는 그 총각을 이리 저리 살펴본 후 힘 좀 쓸 것 같아 승낙을 하였다. 그는 성이 박씨라고 했고 고향은 서라벌이라고 했다.
    부씨는 새로 들어온 박씨에게 바위가 많고 돌이 많은 한 야산을 맡기며 "물이 닿는 곳엔 논을 만들고 물기가 없는 곳엔 밭을 만들라"고 하였다.
    박씨는 그러겠다고 대답을 하고는 그곳으로 가서 그 야산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허리를 굽히어 돌을 하나 주워 들고서는 "아니, 이게 부싯돌이 아니여." 하면서 돌을 부딪쳐 보았다. 그랬더니 불꽃이 아주 많이 튀었다. 이번에는 불꽃이 튀는 곳에 마른 나뭇잎을 대보았더니 불이 잘 붙었다. 너무나 뜻밖인지라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때부터 서서히 욕심이 생긴 박씨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틈틈이 부씨 몰래 사람들이 돌을 가지고 다니기 좋을 만한 크기로 만들었으며 때로는 그렇게 만든 돌을 들킬까봐 땅속에 묻곤 하였다.
    하루는 부씨가 박시에게 일을 얼마나 잘 하는지를 보기위해 일터로 나왔다가 야산이 옥토로 변한 것을 보고는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박씨 사경을 배로 올려야겠어."
    하고 어깨를 톡톡 쳐주며 격려했다. 그 말을 들은 박씨는 행여 감추어 놓은 부싯돌을 들킬까봐 조마조마 하면서
    "사경을 뭘 배로 올립니꺼? 사람이 먹고 살만치 벌면 됐지요."
    라고 불안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부씨는 박씨 속도 모르고
    "아니야, 누가 저 산에 있는 돌을 몽땅 가져갔으면 좋겠어. 그러면 거기에다 밭을 만들 수 있고 햇빛이 잘 비추어서 곡식도 잘 될텐데 말이야."
    부씨가 가리킨 산쪽을 바라보자 박씨는 땅속에 감춰둔 부싯돌이 생각났다. 밭을 만들게 되면 부싯돌을 모두 파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공들여 쌓은 것이 모두 허사가 된다고 생각했다.
    박씨가 괭이를 들고 일을 시작하려고 허리를 구부리자 이때 호주머니에 있던 부싯돌이 부딪치는 바람에 옷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박씨 옷에 불이 붙은 것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부씨였다.
    "이 사람아. 옷이 타네. 이게 웬 일이야."
    "아이 뜨거. 아이 뜨거."
    하고는 펄펄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주옷이라 불이 쉽게 꺼지지 않아 옷을 벗고 힘겹게 껐다. 그때 부씨가
    "이 사람아, 불똥을 갖고 다니나! 왜 옷이 탄 거야."
    하고 물었다.
    "그놈의 부싯돌이…."
    하고 계면쩍은 표정을 하고는 호주머니를 뒤져 부싯돌을 꺼냈다. 부씨는 그 부싯돌을 부딪쳐 보고는
    "아니 이게 불이 잘 일어나는 부싯돌을 어디서 났나. 내가 제일 애먹는 것이 무엇인지 아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불 때문에 난리야. 여름에 날이 뜨거운데도 마당에 불을 피워놓고 불을 보관해야 하고 겨울에 축축한 나무를 땔 때도 불이 일어나야지. 이 사람 큰 재산을 갖고 있었구만. 이거 서라벌에서 가지고 온거야."
    "……"
    박씨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부씨는 연신 부싯돌을 부딪치면서
    "그것 참 희한하네. 여보게, 이 부싯돌하고 이 산하고 바꾸면 어떨까? 아니지 이 산에 딸린 논도 다 자네가 갖고 말이야."
    "……"
    "싫은가? 이봐 그렇게 하지."
    이번에는 사정하듯이 말을 했다. 박씨는 염치가 없는 것 같아
    "너무 과분합니다. 논은 그만두고 산하고만 바꾸지예."
    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부씨는
    "고맙네 고마워. 이 귀한 부싯돌을 나에게 주다니…."
    하고 무척 좋아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박씨는 머슴살이를 그만두고 야산에 밭을 일구면서 부싯돌을 팔아 많은 재물을 모았다. 그래서 큰 산봉우리 아래엔 집을 짓고 작은 봉우리 아래엔 정자를 짓고 편안하게 살았다.

  • 유성구 안산동 뒷산에 오르면 성의 둘레가 약 600미터나 되는 돌로 쌓은 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백제시대 때 쌓은 것으로 아직도 문터와 집터가 거의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산성은 동편에 있는 유성방면에서 오는 적이나 금강을 이용하여 대평리와 감성쪽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기에 아주 적합한 요새지이다. 아직도 이곳에서는 백제시대의 토기편 등이 많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 있는 거의 모든 성이 각각 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이 안산 산성도 예전부터 내려오는 슬픈 얘기가 하나 있다. 백제 시대에 이곳에는 남매 장수를 둔 한 어머니가 있었다고 한다. 두 장수 중 누나가 여자 장수이고, 동생이 남자 장수였다. 남매 장수는 어찌나 기운이 좋고 힘이 센지 무엇을 하든지간에 서로 자기가 이기려고 했다. 어떤 면에서는 남동생보다 누나가 훨씬 영특하고 지혜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예부터 한 집안에 장수가 둘이 나면 하나는 다른 남매를 둔 것이 여간 불안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늘 걱정을 하였다. 이러한 고심을 하고 있던 터에 어머니는 문득 하나의 꾀를 생각해냈다. 그래야만 두 남매에게 끼칠 액을 미리 막을 수 있다고 생각헀던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남매 장수들을 불러 "애들아, 너희 둘 중에 한 명은 돌을 날라 이곳에 성을 쌓는 일을 하고, 또 한 명은 송아지를 몰고 한양까지 다녀오는 일을 하는데, 그 중 먼저 일을 마친 쪽만이 살아남기로 하는 것이 어떻냐?" 하고 제의를 헀다. 서로 힘 겨루기를 일삼고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했던 두 남매장수는 "네 좋아요." 하고 그 제의에 쾌히 승낙했다. 이번 시합이 서로 자기가 이길 좋은 기회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성은 누나인 여자 장수가 쌓기로 하고, 동생인 남자 장수가 송아지를 몰고 한양에 다녀오기로 결정을 보고 시합이 시작되었다. 힘이 좋고 영특한 여자 장수는 돌을 날라 이곳에 성을 쌓는데 불과 며칠이 안되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데, 송아지를 몰고간 아들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심 아들이 이겨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터라 여간 불안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한창 성 쌓기에 열중하고 있는 딸에게 "딸아, 인절미 좀 먹고 하려무나." 하고 떡을 주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딸은 어머니의 정성을 져버릴 수가 없어서 "네 잘 먹을게요." 하고 만나게 먹었다. 떡을 먹고 나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콩을 볶아주어 성 쌓기 작업을 점차 지연시키고 방해하였다. 그러던 중 서울에 갔던 아들 장수가 돌아왔다. 딸 장수는 자기가 이길 것이라고 굳게 장담했었는데 어머니가 해주신 인절미와 볶은 콩을 먹느라 미처 성을 다 쌓지 못했던 것이다. 여자 장수는 한번 약속한 것을 어길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성을 동생 장수에게 물려주고는 자결했다. 이와 비슷한 성에 얽힌 남매 장수 이야기는 안산 산성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논산군 양촌면 산직리에 있는 산직리 산성에도 있다.

  • 유성구 지족동 어느 골짜기에 홀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아버지는 늙었어도 기운이 좋아서 나들이 하기를 즐기셨고, 집안 살림은 그들 부부에게 맡긴 채 여기저기 마을들을 돌아 다니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때만 하여도 숲이 우거져서 호랑이가 실제로 마을을 다녀가기도 하고 산이 험해서 한낮에도 산길을 걷는 것이 위험하였지만 그들의 아버지는 그런 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친구를 찾아 다녔다. 어느날 하루는 비가 많이 내려서 땅이 많이 질퍽거렸지만 이웃 마을에 잔칫집이 있어서 꼭 가야 한다며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서 행장을 챙겨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집을 떠난 후 깊은 산골짜기를 넘어서 이웃집 잔칫집에 당도를 하였다. 젊은 부부는 아버지를 보낸 후 열심히 일을 하였지만 해가 기울어지자 아버지 걱정이 되었다. 다른 때는 늦어도 해가 질 때가 되면 집에 돌아오셨는데 오늘은 어둠이 짙게 깔려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초조하게 등잔불을 켜놓고 기다리다가 아들은 오솔길로 아내는 어린아이를 업은 채 큰길로 나가 보았다. 오솔길로 들어선 아들은 산을 넘어 잔칫집에 찾아갔으나 늦게 집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큰길을 한참 가다가 산길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려서 며느리는 소리 나는 쪽으로 가보았다. 거기에는 자기 시아버지가 풀숲에서 누운 채 술에 취해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며느리는 아버지를 깨우려고 가까이 가서 보니 거기에는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자기 아버지를 지켜보며 앉아 있었다. 며느리는 놀라서 한참 섰다가 호랑이는 잠자는 사람은 해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고 아버지가 잠에서 깨어나면 잡아먹으려고 기다리는 것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온몸이 오싹오싹 떨리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어디 좋은 생각이 없을까 하다가 업고 있는 애기를 호랑이 가까이에 눕혀놓고 아버지를 깨운 다음 아무 말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아기를 찾으러 갔으나 아기는 그 자리에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며느리는 남편과 같이 밤새 울음으로 지세웠다. 아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에게 들킬까봐 이불 속에서 그들은 흐느끼다가 다시 아들을 낳으면 되지 하고 잠이 들려고 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아랫골 샘 근처에서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며느리는 문을 박차고 달려갔다. 아이는 강보에 싸인 채 얼굴만 내밀고 울고 있었다. 며느리는 너무 반가워서 어린아이를 안고 집으로 재빨리 돌아왔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는 아무리 짐승이라도 호랑이는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해치지 않는 것이라고 자랑 삼아서 나이 많은 아버지와 젊은 부부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 유성구 금탄동에 '튼탯골'이라 하는 마을 뒤에 높이가 대략 200미터 정도 되는 산이 있는데 매방산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은 산세가 매화낙지형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 하여 지관들의 발길이 예로부터 끊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옛날에 정사에 관여했다가 역적으로 몰린 선비가 있었다. 선비는 자기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다른 지방으로 유배되어 충청도 홍성에 있는 결성 땅에 자리잡게 되었다. 선비는 원래 돈을 잘 모르고 물욕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집안도 가난하여 그가 유배된 곳에 지니고 온 물건도 값나가는 것이 없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글만 읽다가 하루는 심심하고 답답하여 큰 먹돌 하나를 구하여 작은 돌멩이로 갈아서 벼루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가 유배된지 일 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났을 때 집에 두고 온 아내와 하나 밖에 없는 딸 아이가 생각나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자기 옆에 아내가 앉아서 웃고 딸아이가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꿈속에서 깨어난 그는 불길한 꿈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꿈을 꾸던 그 다음 날 아침에 누군가 사립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인기척 소리가 나서 선비가 방문을 열고 나가 보았더니 거기에는 뜻밖에도 자기 딸아이가 거지 모양을 하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너무 반가워하며 딸을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딸은 선비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따라 오라는 것이었다. 유배를 떠나 살때는 관의 허락 없이 다른 지역으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하는 것이지만 딸의 행동이 너무도 이상하여 그는 딸을 앞세우고 어느 깊숙한 산중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올라가다가 딸은 숨을 가쁘게 쉬며 앞가슴에 감추어 가지고 온 쪽지 하나를 선비에게 주었다. 그 쪽지는 어느날 나이 많은 한 노승이 자기의 집에 들려서 아버지에게 전하라고 하면서 써준 것이라 하였다. 선비는 딸아이가 준 쪽지를 펴보니 '공주매방산'이라는 다섯 글자만 쓰여 있었다. 딸 아이가 말하기를 노승이 이 쪽지를 주면서 "너는 그곳을 찾아가서 아버지를 도우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딸은 어서 그곳을 찾아가자고 선비를 졸라댔다. 아버지가 여기에 오래 계시면 틀림없이 큰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때 선비는 자기가 거처했던 집 근처를 되돌아와보니 관아에서 포졸들이 떼를 지어와서 집을 뒤지고 있었다. 선비는 그 길로 딸을 따라서 도망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매방산에 와서 대나무 숲에 뗏집을 짓고 딸이 밖에 나가 동냥하여 온 것을 가지고 근근히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그가 여기에 와서 보니 대밭이 많아서 매우 좋아 하였다. 선비는 대나무로 붓을 만들고 나니 지난번 결성 땅에서 만들었던 벼루 생각도 간절하였다. 그는 붓을 만들면서 무심코 벼루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날 당장 딸은 결성 땅으로 벼루를 가지러 갔다. 그러나 딸은 벼루를 가지러 결성땅에 가서 벼루를 들고 나오다가 망을 보고있던 포졸들에게 붙잡혀 관가에 끌려가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자기 아버지가 있는 곳을 불지 않았다. 그러다가 딸은 죽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딸을 기다리기를 며칠을 보내고 하루는 여러 날 굶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눈을 감았는데 딸이 꿈속에 나타났다. 머리를 푼 채로 포졸들에게 매를 맞으며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는 것이었다. 그는 잠결에 딸 이름을 부르다가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주위엔 어둠만이 짙게 깔려 있을 뿐이었다. 그 다음 날이었다. 어떤 행차인지 멀리 대감의 꽃가마가 보이더니 선비가 있는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는 뗏집에서 얼굴만 내밀었다. 이번에는 나졸들이 이쪽 대밭이 있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걸어오더니 자기 이름을 대며 "대감, 대감"하는 것이었다. 선비는 죽기를 무릅쓰고 나와보니 이제는 귀양살이도 해지 되었고 그대에게 큰 벼슬이 내려졌다. 그리하여 선비는 다시 벼슬살이를 시작했는데 죽은 딸을 생각 때문에 일찍 벼슬을 그만두고 결성 땅에서 죽은 딸의 넋을 위로하며 대나무 붓과 벼슬을 벗삼아 지내다가 죽었다. 지금도 매방산에는 명당이 있다고 한다. 그 명당자리는 그가 뗏집을 짓고 살았던 자리라 하는데 아직도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이 명당자리에 집을 지으면 크게 성공을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있다.

  • 선비들이 지날 때마다 소나무가 정자처럼 서있다는 소쟁이마을에 들려서 한번씩 우러러보는 나무가 소쟁이의 말채나무였다. 신도안이 앞으로 도읍지가 된다 해서 꼭 그렇게 믿고 이태조가 여기를 도읍지로 지적한 것이었다. 산이 수려하고 나라의 중심부에 자리를 정하겠다는 안목에서 그리 서둘러 보았지만 너무나 벅찬 계획이었고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어쩐지 마음이 설레여서 신도안에 내려왔다가 이정표처럼 그곳에 말채를 집어 던진 것이 그 나무가 살아서 무럭무럭 자랐다. 조선시대 명종 임금 때부터 어쩐 일인지 말채나무가 시들시들해 갔다. 전라도에 유배되었던 선비 한 사람이 유배에서 풀려 나와서 한양으로 가는 길에 정도전을 생각하면서 여기를 찾았다가 말채나무 아래에 비스듬히 누웠다. 그리고 석학이었던 정도전의 글을 생각하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먼 길을 걸어와서 다리는 욱신욱신 쑤셨으나 잠이 들어서는 그런 충격이 없어서 좋았다. 그가 한참동안 잠을 자는데 꿈을 꾸게 되었다. 꿈에 삿갓을 쓴 선비가 나타나서는 "너 이놈,여기가 어디라고 사지를 펴고 잠을 자느냐! 그래도 나라에 쓸 만한 놈이 한 사람태어났다 고 좋아했더니 이런데서 실수를 하다니, 이봐라 네가 알고 있어라. 앞으로 국난이 있을 터인즉 그것을 즉시 알려야 하느리라. 아니지. 대비를 해야지, 그래도 이놈이 드러누워 있구나. 이놈아....... 이놈아." 꿈속에 삿갓을 쓴 선비가 마구 발로 걷어찼다. 아픔을 견디다 못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꿈이었다. 선비는 일어서서 몇 번 말채나무에 절을 하고는 한양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가 말채나무가 보이는 언덕에 서서 말채나무를 바라보았더니 나무가 사람처럼 보였다. 나무가 손을 흔들었다. 그는 바삐 한양으로 올라가서 선비들을 만나서 왜구들이 쳐들어 올 것이라고 말을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놈, 미친 놈이구만. 이 태평성대에 싸움이라니, 그놈이 유배되더니 정신도 나갔구만...." 그를 상대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한번 유배된 후 그는 벼슬길에 오르기도 어려울 것 같아 충청도 진잠땅으로 내려가서 쉬기로 했다. 그래서 그해 가을에 진잠땅에 내려왔다. 말채나무는 파릇하게 서 있었다. 말채나무를 위하면서 그는 살았다. 그럭저럭 세월은 흐르고 선조 20년경에 이르렀다. 선비는 그후 한번 벼슬길에 올랐으나 국난이 임박했다고 여러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가 나중에는 이상한 정신병자로 몰려서 관직까지 박탈당하고 이곳에 내려왔다. 이제는 그도 늙어서 생각하는 깊이가 더욱 깊어갈 때였다. 하루는 들에 나갔다가 말채나무 가까이 갔다. 거름을 주어도 여전히 나무는 시들시들했다. 그는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조정에 올리는 장계를 써서 올렸다. "대왕마마, 나라 안에 큰 난리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통첩하여 주시옵소서. 남쪽에서 오랑캐들이 쳐들어올 것입니다." 하고 긴장계를 올렸으나, 장계를 받아들은 관원들로부터 묵살이 되면서 "미친 놈이 아직 살아 있구만"하고미움까지 사게 되었다. 말채나무는 여전히 시들시들하면서 한 겨울을 보내고 다음해 봄이 되었다. 선비는 거동이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을 때 말채나무 가까이 가서 살았다. 봄이 가고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음력 사월달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이번에는 시들시들한 나무가 밤이면 울기까지 했다. 꼬박 하루 밤을 말채나무가 울며 새울 때, 그도 나무를 붙잡고 울었다. "하늘이여, 울기만 하면 어찌 하오리까. 옛날 내 발을 걷어찰 때처럼 계시를 내려 주십시오" 하고 나무를 껴안았다. 그러다가 그는 말채나무 아래에서 죽고 말았다. 그가 죽던날 말채나무는 더욱 슬프게 울었으며 오랑캐들은 쳐들어 왔다. 그리고 임진왜란이란 어려운 고비를 넘겨야 했다. 말채나무는 왜구들이 7년 동안 우리나라를 침범하였을 때는 항시 시들시들 하였으나 왜구들이 물러가자 다시 나뭇잎이 파릇파릇해졌으며 병자호란때에도 나뭇잎이 시들시들하면서 죽어가다가 외란을 극복하자 다시 살아났으며 근래에 와서 역시 왜구가 이 나라 강산을 지배할 때 그 기간이 너무 길었던지 말라 죽고는 다시 새순이 나와서 큰 나무로 자라갔다. 유성구 송정동 소쟁이 마을에 있는 말채나무는 그래서 국난을 예고해주는 나무로 알려졌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나무와 함께 산정진사의 무덤은 말채나무가 보이는 곳에 자리해 있다 하였는데, 달밝은 밤에는 정진사가 무덤에서 나와 말채나무 아래로 다가와서는 서로 대화를 하다가 새벽닭이 울기 전에 무덤 속으로 돌아가곤 한다고 전한다.

  • 유성구 구암동에 유성 현터가 있다. 현터에는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들이 묵어가는 객사가 있었다. 지금은 헐려서 볼 수 없지만 이 객사는 조선시대 어사로 명성을 떨쳤던 박문수와 인연이 깊었던 곳이다. 박문수가 과거에 급제한 것은 그의 나이 33세가 되던 해였다. 경종 3년(1723) 증광병과에 급제한 뒤에 설서, 검열, 기사관등 내직을 주로 맡았다. 박문수는 매우 총명하고 명철하여 영조의 신임을 독차지하였다. 그는 병조정랑 사서로 있을 때 청주에서 일어난 이인직의 난에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 결과로 영조는 1727년 박문수를 영남 감진어사로 보내었다. 감진어사란 진휼을 감독하는 어사를 말한다. 즉 흉년에 굶주리는 백성을 구하는 일을 감독하기 위하여 파견하는 어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 결과 영남 감진어사로 제수받은 박문수는 길을 재촉하였다. 박문수는 천안 유구 공주 노성을 거쳐 연산, 진산, 금산, 무주로 해서 대구에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박문수가 공주에 도착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박문수는 공주에서 노성으로 가던 발길을 유성으로 돌렸다. 유성에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묘가 있었던 것이다. 박문수는 해가 다 저물어서야 유성에 도착하였다. 우선 유성객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선영에 가서 성묘를 한 다음 노성으로 갈 계획이었다. 유성현감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저녁밥을 먹고 담소를 나누다가 잠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유성현감은 박문수를 객사에 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거처하는 사랑채로 안내하려는 것이었다. "어사님, 누추하지만 오늘 밤은 제 집에서 주무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객사에서 자겠소." "객사가 좀….." "객사가 어떻다는 말이요." "……" "무슨 말인지를 말해보시오." 현감은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드디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객사에 묵은 관리들이 변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 "그게 무슨 말이요?" "……" 현감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박문수가 다그치는 바람에 대답을 했다. 그에 의하면 무슨 연고인지는 모르지만 객사에서 잠을 자던 사람이 두 사람이나 죽어서 나왔다는 것이다. 박문수는 어사로서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현감에게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이른 다음 객사로 들어갔다. 객사는 그 동안 얼마나 사용하지 않았는지 스산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오늘 밤 자다가 무슨 일이 일어 날른지 모른다. 박문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대담하게 자리에 누웠다. 밤이 깊어갔다. 초경이 지나고 이제 삼경이 가까워졌다. 박문수는 잠을 자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어느새 졸음이 오고 있었다. 한참 잠이 들려고 하는데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박문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그 자리에 누운채로 눈을 살포시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촛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미하게 움직이더니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마치 선녀가 춤을 추듯이 하느적하느적 하는 것이었다. 박문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경계하는 마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천장이 순식간에 찢어지면서 남자의 다리 두개가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 순간 박문수는 불끈 일어나 두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끌어 않았던 두 다리는 간 곳이 없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박문수는 다시 마음을 안정시키며 둘러보니 천장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박문수는 이튿날 일어나자마자 현감을 시켜 천장 위를 샅샅이 뒤지게 하였다. 그 결과 천장에 올라갔던 아전이 커다란 돈 자루를 들고 내려왔다. 오래된 엽전이 자루에 가득히 들어 있었다. 어느 현감이 몰래 감추어 놓았던 것을 잊고 있었던 돈이었다. 그 돈이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니까 사람으로 둔갑하여 내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사람 다리를 보면 기절부터 하였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다시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 유성구 학하동 수통골에 수통굴이란 굴이 있다. 수통골 입구 주차장에서 빈계산 정상을 향해서 750미터 정도 올라가면 큰 굴이 있는데 이 굴을 수통굴이라 한다. 이 굴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수통골 골짜기는 산수가 뛰어나게 아름다운 골짜기다. 금수봉 아래에서 발원하는 계곡물은 옥같이 맑고 깨끗할 뿐 아니라 골짜기를 가득 메운 산림은 울창하여 모처럼 찾아오는 나그네들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그만큼 자연 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답다. 이처럼 아름다운 곳이고 보니 수도승이 찾지 않을리 없다. 신라시대의 의상대사가 소승시절 이 굴에 와서 수도를 했다고 한다. 그는 총명하고 불심이 깊어서 세상의 모든 일은 뒤로하고 오직 수도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굴속에서 천지조화의 이치를 깨달은 나머지 그는 마침내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와 교통하기에 이르렀다. 옥황상제는 의상이 수도에만 전념하고 있는 점을 귀히 여겨 의상의 토굴생활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옥황상제는 의상이 1분이라도 아껴가며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에게 하늘의 음식을 보내주기로 했다. 옥황상제는 의상이 먹을 것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천녹사를 시켜서 음식을 보내주었다. 그래서 의상은 식사를 만들어 먹지 않고 하늘에서 보내주는 음식을 먹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의상이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천녹사를 불러 하늘에서 음식을 가져오게 하였다. 옥황상제는 의상의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언제든지 음식을 보내주었다. 그리하여 의상은 언제나 하늘의 음식을 먹으며 수도를 했다. 그때 계룡산 삼불봉에는 원효대사가 오랫동안 공부하고 있었다. 이제나 그제나 원효는 신라를 대표하는 스님이었다. 사람들은 의상을 원효 보다 낮게 생각하였다. 의상은 세상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이 조금은 못 마땅하였다. 의상은 원효를 초청해서 자기의 도력과 옥황상제로부터 음식을 받아 먹고 있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의상은 원효를 수통굴로 초청했다. 그리고 그는 천녹사를 불러서 그에게 "오늘은 귀한 손님이 오실 테니 점심때 밥 두 상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날 점심때가 가까이 되었다. 삼불봉에 있던 원효가 의상을 찾아왔다. 의상과 원효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천녹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의상은 내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원효는 이제 그만 가겠다고 하였다. 의상은 당황하여 원효의 앞을 가로 막으며 조금 더 쉬었다가 가라고 권했다. 원효는 의상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래도 천녹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의상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머물렀던 원효는 다시 일어났다. 의상은 더 이상 붙들을 수가 없었다. 원효는 마침내 수통굴을 떠나갔다. 의상은 손님을 청해놓고 점심도 대접하지 못한 채 돌려보낸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돌아섰다. 그런데 막 입구로 들어서는데 그때 천녹사가 점심밥을 들고 들어왔다. 의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침에 그렇게까지 신신당부를 했는데 이제야 온다니 말이 되는가. 천녹사가 조금만 일찍 도착했어도 원효에게 하늘의 음식을 대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의상은 못내 아쉬웠다. 그리고 화가 났다. 그는 마침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내가 그처럼 신신당부를 했는데 점심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니 무슨 일인가." 아주 불쾌한 말투였다. 천녹사는 의상의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는 듯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침에 원효대사께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은 내가 의상한테로 놀러가니 너는 내가 의상하고 이야기하고 있을 때는 절대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해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천녹사는 이렇게 말하면서 방금 원효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서 이제야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의상은 그제야 원효가 자기보다 더 도통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의상은 자기가 하늘 음식 먹는 것을 원효에게 과시하려고 했던 점을 생각할 때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의상은 원효를 선생으로 모셨다고 한다. 의상대사가 수통굴에서 수도를 했는지 안했는지 확실한 고증은 없다. 다만 지금도 이 굴을 의상대사굴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 유성구 방동 방골에서 서쪽으로 약 4Km 정도 가면 옻샘이란 샘이 있다.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이 샘물은 한 여름에도 얼음처럼 차고 맑다. 이 샘은 옻샘이라 부르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있다. 옛날, 연산에 이생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생은 성품이 착한 데다가 머리도 총명하고 명철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촉망의 대상이었다. 서당에서 훈장 선생님이 한 가지를 가르쳐 주면 그는 열 가지를 깨달았다. 그래서 이생은 다른 학생들에게 늘 모범이었다. 그는 여덟 살 때 동몽선습을 떼고 열 살 때는 명심보감을 떼었다.모두들 이생이 자라서 크게 될 사람이라고 했다. 이러한 아들을 둔 그의 어머니는 이생을 가르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홀로 된 몸이지만 남편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남편도 청운의 꿈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다가 몸이 약해져서 아내와 아들을 남겨두고 죽었기 때문이다. 이생의 어머니는 아들을 공부시켜 과거에 급제 시키는 것만이 죽은 남편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이생의 어머니는 아들의 나이가 열살이 넘으면서부터 그를 신도안으로 보냈다. 어느 암자에 훌륭한 선생님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그는 마음을 야무지게 가다듬고 말했다. "한석봉이 공부하다가 중간에 집에 돌아온 것을 그의 어머니가 한석봉을 공부하던 절로 되돌려 보냈다는 이야기를 알지 않느냐. 나는 한석봉의 어머니보다 더 마음이 모질다. 너는 과거에 붙기 전에는 절대로 집으로 돌아와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면 나는 너를 자식으로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생의 어머니는 어린 자식을 이렇게 훈계하며 아들을 떠나보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을 훌륭하게 길러 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날로 이생은 신도안에 있는 암자에 도착하여 학업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 어려운 사서삼경을 하나씩 독파해 나갔다. 그러는 가운데 몇 해가 지나갔다. 이생은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지척에 있는 어머니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주 야속했다. 그러나 그는 참아야 했다. 집을 나설 때 어머니의 단호한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가 어머니를 만나는 길은 오직 과거에 급제 하는 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공부한 나머지 드디어 과거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선생님에게 큰 절을 올린 다음 한양을 향하여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한양에 당도하여 과거준비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길을 가다가 지름길이 있으면 가시덤불이 가로 막아도 그 길로 걸어갔다. 그만큼 그는 마음이 조급했다. 이생은 잠시도 쉬지 않고 걸어갔다. 그런데 몸이 가려웠다. 이생은 가려운 곳을 무의식적으로 긁으며 걸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 갈수록 더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도 전신이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생은 길을 멈추고 몸을 살펴보았다. 온몸에 옻이 올라 있었다. 큰일 났다. 과거고 뭐고 다 집어 치우고 암자로 다시 돌아가야 할판이다. 이생은 십 년 동안 보고 싶은 어머니도 만나지 않고 공부한 끝에 이제야 과거길 오르게 되었는데 과거장엔 가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되었으니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생은 한양가는 길을 포기하고 되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개나리 봇짐을 둘러 메고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샘물이 보였다. 그는 목이나 축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곳으로 갔다.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샘물을 가려운 곳에 발랐다. 특별히 어떤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가려우니까 그저 발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살갗이 빨갛게 오돌도돌 일어났던 피부가 원상으로 돌아가며 가려운 것도 모두 없어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이생은 즉시 옷을 벗고 그 샘물을 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잠깐 동안에 몸에서 옻이 사라지고 깨끗해지는 것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이생은 그 길로 한양으로 달려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생은 그 동안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어서 당당하게 장원급제 하였다. 이생은 이제 그리웠던 어머니를 만나는 것 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옻을 치료했던 샘물가에 이르렀다. 이생은 샘물을 보자 그 샘이 고맙기 짝이 없었다. 이생은 샘물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의 자기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감사한 마음의 정표로 샘가에 팽나무 한 그루를 기념으로 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심은 나무는 뒤에 정자나무가 되어 길가는 나그네들에게 오랫동안 그늘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그 나무가 몇 년전까지도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이 샘을 옻샘이라 불렀다고 한다.

  • 유성구 신동 녹골에 소문산이란 산이 있다. 이 산을 소문산이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다름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옛날 이 산 근처에 소씨와 문씨가 살고있었다. 두 사람은 똑같이 군대에 나가 수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청년들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키도 크고 건장한데다가 부지런하고 일도 잘 했다. 논밭도 식구들이 먹고 살 만큼 있어서 두 집은 그렇게 구차하게 살지도 않았다.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소씨는 아버지만 계셨고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씨는 어머니가 해야할 일을 도맡아서 해야했고, 문씨는 아버지가 해야할 일을 모두 감당해야 했다. 어느 가을 이었다. 소씨에게 중매가 들어왔다. 이웃 마을에 있는 이씨 집안의 아름다운 규수였다. 그는 용모도 단정하고, 예절도 바르고, 일도 잘하는 처녀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소씨는 이미 소문으로 처녀를 잘 알고 있었던 관계로 중매쟁이에게 꼭 성사시켜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한편 문씨에게도 중매가 들어왔다. 중매쟁이는 달랐지만 신부감이 될 처녀는 역시 소씨와 혼인얘기가 있는 이씨 집안의 처녀였다. 문씨도 역시 소문을 들어 이씨네집 처녀가 아름답고 예절도 바른데다가 일도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혼인이 꼭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중매쟁이에게 부탁을 했다. 이런 관계로 양쪽 집 중매쟁이들은 각기 혼인이 이루어지도록 노력을 했다. 소씨측 중매쟁이는 소씨 같은 총각이 없다고 했고, 문씨측 중매쟁이는 문씨 같은 신랑감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 이들은 각기 결혼 경쟁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로부터 상대방을 비방하기 시작했다. 소씨측 중매쟁이는 "귀한 딸을 홀어미만 있는 집에 시집보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했고, 문씨측 중매장이는 문씨 측 중매쟁이대로 "홀아비 밑에서 배운 것도 없는 집안에 귀한 딸을 시집보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했다. 그 결과, 이씨집 처녀는 엉뚱하게도 제삼자인 최씨네 집으로 시집을 가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소씨네 집과 문씨네 집은 서로 상종을 하지도 않았다. 길거리에서 만나도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두 집사이에는 내왕이 전혀 없었다. 후대에 와서 어쩌다 혼사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두 집에서는 모두 똑같이 펄쩍 뛰었다. 초상이 나도 문상을 가는 법이 없었다. 그야말로 견원지간이 되고 말았다. 어른들이 이렇게 원수처럼 지내오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도 덩달아 서로 멀리하고 살았다. 그러기를 수대에 걸쳐 내려왔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두 집안의 관계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변하지 아니 하였다. 그런 어느 해였다. 소씨 집안의 갑돌이와 문씨 집안의 갑순이는 부모들 몰래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몰래 만나서 이미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게된 양쪽 집의 부모들은 결사 반대였다. 그뿐만 아니라 양가의 부모들은 자기들의 자녀들로 하여금 문밖 출입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각기 죽기를 각오했지만 마지막으로 그들은 상대방을 다시 한번 만나기로 했다. 그들은 몰래 집을 빠져 나와 뒷산으로 올라갔다. 옛성터가 있는 산 정상에는 둥근 보름달이 높이 떠 있었다. 그들은 달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다가 마침내는 함께 죽기로 결심했다. 산 북쪽 아래에 흐르고 있는 강물에 몸을 던지기로 한것이다. 그들은 그 자리에 조그만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두 사람이 살아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느티나무를 통해서 영원히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양가 부모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은 뒤부터 양가 부모들이 서로 화해하고 살거나 아니면 멀리 떠나 서로 원한을 잊고 살기를 기원하는 편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쓴 편지를 금방 심은 느티나무에 매달았다. 그런 다음 그들은 강가로 뛰어내려가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를 본 소씨 집 사람들은 모두 전라도로 이사가고 문씨 집 사람들은 모두 경상도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그 뒤로 사람들은 이 산을 소씨와 문씨의 한이 맺혀 있는 산이라해서 소문산이라고 부른다. 지금 소문산 꼭대기에는 약 200년쯤 되어보이는 느티나무 한 그루 서 있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기 전에 마지막 심은 사랑의 나무라고 한다

  • 유성의 전설자료 중 양적으로 비교적 풍부한 양상을 보여주는 것은 암석전설이다. 고래로 거석이나 기암은 신앙적 대상물로 인식 되어져 왔고, 또한 그것들은 다양한 전설이 만들어지는 산실 구실을 하기도 했다. 유성지역의 도처에 산재해 있는 거석이나 괴석들 역시 전설의 증거물로 등장하고 있는데, 다음에는 유성의 암석전설 자료를 일부 소개해 보기로 하겠다. 유성구 지족동 가마골 마을에는 왕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 얽혀 있는 암석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지족동 마을의 산줄기에 커다란 방죽이 있었다. 그 방죽 안에는 고래가 산다고 하여 고래들이라 하기도 하고 상어가 산다고 하여 상어들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아주 힘이 센 여자장수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이 여장수가 치마에 바위를 싸 가지고 이곳을 지나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마침 이 커다란 방죽이 터지려고 하였다. 이를 본 여장수는 이 방죽이 터지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치마에 싸가지고 가던 바위를 쏟아놓았다. 이때 그 여장수가 쏟아놓은 바위가 지금도 있는데, 이바위를 왕바위라 한다.

  • 먼 옛날 이고장 은골에 가난한 선비 어씨와 그의 처 장씨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아내는 온갖 고생을 다하며 남편 어공을 도와 가정을 유지하던 어느날, 어공이 뜻밖에 어디서 무슨 책을 읽고,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아내보고 하는 말이, 나는 지금부터 산중에 들어가 신선의 도학을 연구하고 올테니 당신은 내가 다녀올 때까지 혼자 고생이 되어도 참고 살라고 하며 무심히 집을 나가 금강산에 들어가 10년을 하루같이 공부하여 신선의 도가 통달하자, 공부를 다 마치고 같이 공부하던 학우들과 작별주 한 잔씩을 하고 학을 타고 고향에 돌아와 보니, 자기가 살던 곳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어공이 자기 처의 행적을 물으니, 그때도 전설처럼 백여년 전에 어씨, 장씨 부부가 살다가 남편 어씨가 신선의 도학을 떠나 후, 부인 장씨는 남편의 도학성공을 위해 지금의 장선재에 올라가 동, 서, 남, 북을 향해 매일같이 기도하니, 그때는 망선재라고 불렀었는데 그 부인이 망가무당의 부정한 언동에 못이겨 망선재에서 자살하니, 그 몸이 굳어 바위로 변했기에 지금은 장선재라 한다는 것이며, 그때 방적 두목이 아름답게 가적으로 변하여 장부인을 유도하려 다니던 말발굽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고 부인이 자살후 가적은 벼락을 맞았기로 그곳을 일러 가적골 벼리수라 한다는 것이다. 저너머 동네 지금은 어은1구는 사람 살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어신선이 이 말을 듣고 분기충천하여 지금의 삼개부락에 가서 세 번을 방적에게 경례하였으나 방적당이 듣지 아니하므로, 어공이 지금의 들말리 영거리에 영을 내려 작은 대작골에서 작전을 시작, 큰대작골에서 작전을 하고, 지금이 삼전리에 가 세 번째 대전으로 방적을 대파하니 천지가 파여서 물이 고이매, 어신선이 말하기를 지금은 방적당이 있어 방적골이지만, 방적이 죽었으니 방죽은골이라하고, 후세에 물이 잘 고여 농업에 유리하게 되면 방익골이 되리라 하고 , 어신선은 그래도 부인 장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금의 어은곡동 서편 산마루에 올라가 북쪽 장선재를 향하여 부인의 명복을 빌다가, 그 자리에서 어공 역시 굳어져서 바위로 변하니, 이후부터 사람들이 이 바위를 일컬어 선바위라 하며, 지명도 어신선이 숨었다 하여, 고기 어자, 숨을 은자를 써서 어은이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이상한 것은 그때 어공이 타고온 학이 앉은 자리에서 현재까지 천연수로 샘물이 많이 나와 이고장 사람들은 물 걱정이 전혀 없고, 샘이름도 지금까지 학샘이라고 부르는데, 인근 동네에서 샘을 파고 물맛이 안좋을 때 학샘 물을 한 그릇 떠다 놓고 정성을 드리면 그 물맛도 좋아진다고 한다.

  • 백제 말기 때다. 백제 의자왕이 방탕해져서 나라 살림이 어려울 때, 신라군은 수시로 백제땅을 침범해 왔었다. 비록 왕실은 허탈에 빠져 갈피를 못잡고 있었으나, 백제군사들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잘 싸웠다. 여기 '성재산'에 있던 백제군사들은 동면에 진을 쳤으며 넓은 들로 침범해오는 신라군과 싸우다가 부득이 여기까지 밀려와서 성을 쌓고 있었다. 여기 성재산을 지키는 장수는 참 훌륭한 장수였다. 그는 싸움터에서 꼭꼭 스님 한사람과 고락을 같이하며 싸우고 있었는데, 스님이 살육을 금하라 하면 싸우다가도 백성들을 먼저 싸움터에서 내보내고 뒤를 이어 후퇴하곤 하였다. 하루는 신라 병사들이 백제땅 깊숙히 들어와서 지금의 신탄진 부근에 진을 치고 지나가는 백성들을 마구 죽일 때 그는 참을 수가 없어서 스님에게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스님은 곰곰히 생각하더니, "싸움은 군사와 군사끼리 하는 싸움이지 백성들을 죽일 수야 없지요"하고 대답하자 그는 불현 듯 군사를 이끌고 들판으로 쳐들어 갔다. 그는 쳐들어가서도 창칼없는 사람은 죽이지 말라 했다. 백제군사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싸웠다. 신라군은 산으로 도망하기 시작하였고, 백제군은 그 뒤를 쫓는데, 이때 신라쪽에서 노승이 한 사람 가까이 와서 백제의 스님에게 말하기를 , "쫓기는 군사를 더 쫓을 필요가 있느냐? 백제는 쫓기는 군사만 치느냐?"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노승의 말을 듣던 백제의 스님은 공손히 합장한 다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무고한 백성을 마구 살육하였으니, 신라군이 쫓기는 것은 하늘이 벌을 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피에 굶주린 자를 내쫓는 것이 죄가 되옵니까?" 두스님은 눈을 부릅뜨고 한참 눈싸움을 했다. 한참 서있던 백제의 스님이 입을 열고 말을 했다. "불문에 살육을 금하라 한 것은 불인의 첫 목적이거늘 살육을 삼가토록 노력할 의향은 없으신지요." 그러자 노승은 "말해 보시오" 하고 굳은 얼굴을 하자, 백제의 스님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곳은 모르나 스님이 자리한 신라의 진영이나 소인이 자리한 백제 진영에서나마 살육이없도록 하십시다. 소인이 백제장수에게 말해서 백제군이 강 건너로 물러가도록 하지요"하고 돌아섰다. 그러자 그래도 그의 말이 의심스럽던지 "먼저 실행해 보시지요" 하곤 총총히 산으로 사라져 갔다. 백제의 스님은 백제의 진영에 와서 백제장수에게 물러가자고 말을 했다 그래서 백제장수는 군사를 이끌고 덕진 땅으로 와서 성을 쌓고 여기서 백제군을 주둔시켰다. '성재산'에 성을 쌓고 진을 친 백제군사들은 이곳까지 신라군이 쳐들어 오면 봉화를 올려서 강건너에 있는 노승에게 알렸다 한다. 어떤 때는 하루종일 봉화가 오를 때가 있었다. 이런때는 신라군이 성을 공격하며 돌아가지 않을 때라 했다. 백제의 군사들은 '성재산'에 진을 치고 가까이 오면 화살을 날렸다. 일제히 화살을 날리면 신라 병사들이 수없이 쓰러졌다. 신라 병사들이 쓰러질 때 마다 스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죽음 뿐인데"하고 다시 봉화불에 나무를 갖다 넣었다 한다. 백제의자왕이 항복할 때까지 신라군이 한 번도 정복하지 못하였던 산성이 여기'성재산'이라 한다.. 백제가 망하자 여기 장수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며, 그의 부하들은 모두 창칼을 버리고 농사를 지으러 여기근처에 자리잡았다. 그래서 백제 멸망 후에도 이 '성재산'엔 가끔 옛날 여기를 지키던 백제군사들이 일년에 한번씩 모여 스님이 된 장수와 앉아서 그동안의 고락을 묻곤하였다 한다. 지금도 '성재산'에 오르면 옛날에 있었던 고목이 한그루 서있다 여기가 바로 봉화를 올렸던 자리라 한다. 그런데 이 성재산의 성터에 얽힌 성지 전설중에는 위에서 제시한 것 같은 ' 오누이 힘내기 전설' 유형의 내용이 아닌 자료도 있다. 이 자료에서는 성재산의 성터가 백제 때 백제의 군사들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전설의 내용을 제시해 보며 다음과 같다. 전설자료의 내용과 비교할 때, 훨씬 단편적인 내용으로 조사된 성재산 전설자료(사재동)가 있다. 이 전설에서도 이성터는 백제군사들에 의해 쌓아진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다. 참고로 이 전설의 내용을 들어 보기로 한다. 이 성은 고구려 보장왕 때 연개소문이 쌓았다고 전해지는데, 연개소문성을 줄여 소문성이라 부른다고 전한다. 이 성의 정상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그 우물의 깊이는 명주 한타래의 실이 다들어 갈정도로 아주 깊었다고 한다. 이 성안에는 철마가 있었다. 그런데 이 철마의 머리를 신동으로 돌리면 신동에 우환이 생기곤 했다 한다. 그래서 금호리 사람들이 이 철마를 부수어 버려 지금은 이철마가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 옛날, 이 마을에서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처녀가 자주 없어지므로 항시 슬픔속에서 지냈으나 그 처녀들이 없어지는 까닭을 몰랐었다. 하루는 도승이 여기를 지나가므로 마을 사람들이 슬픈 사연을 호소하자, 그 도승은 마을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아마 오늘 저녁에도 마을 처녀가 하나 또 사라지는데 그 방비책으로는 날이 어두워지면서 뒷산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은 산의 형국에서 불빛이 번쩍번쩍 하거든 그 쪽을 향해서 화살을 날리면 그후 부터는 그런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 호산을 한번 바라보고서 그럴것없이 내가 저녁에 해치우리라 하고는 들고 있던 지팡이에서 활을 꺼내서는 활을 만들고 쉬는 것 이었다. 그날밤 아니나 다를까 저녁에 어둠이 밀려오자 갑자기 호산에서 불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그 불빛을 보고 마을의 한 처녀가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고 새옷을 입고 어디론가 떠날차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도승은 차분히 언덕에 올라가서는 한쪽을 한참 바라보다가 활을 들고는 침착하게 화살을 날리자, 그 화살은 쏜살같이 어둠속으로 사라지며 한참만에 호산에서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소리와 함께 신음하는 호랑이 소리가 나더니, 불빛이 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떠날 차비로 마루에 나왔던 처녀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나들이옷을 벗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다시 처녀가 없어지는 소동은 없어졌다 한다. 그후 여기 마을 사람들은 그 호산을 호산이라고 부르지 않고 흉산이라고 부른다 한다.

  • 옛날 지금의 송강동에 늙은 영감이 있었는데, 부자이나 욕심 많은 구두쇠이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쌀 한줌 꾸어주지 않고 스님에게 시주 한번 하지 않아 사람들은 이 영감을 딱정쇠영감이라 불렀다. 어느날 조 부자가 광에 가득 있는 볏섬을 둘러보고 흐믓한 기분에 젖어 있는데, 대문밖에서 목탁소리가 들리자 어느 중이 동냥왔거니 하면서 육간대청에 앉아 긴 장죽을 빨고 있었다. 그의 인색한 성품이 중에게 시주할 사람이 아니나, 오늘따라 유난히 목탁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며느리를 불러 "밖에 뉘집 개가 온모양이다."라고 말 하였다. 영감은 "나가서 줄 것이 없다고 돌려 보내라"고 하니, 며느리는 "거지가 아닌 스님입니다."라고 하였다. 영감은 "스님은 무슨 스님이냐. 까까중이라 까마귀처럼 시끄럽다."며, "시주할 것 없으니 썩 물러가라"고 하였다. 며느리는 시주 얻으러 온 스님을 그냥보낼 수 없어 시아버지 몰래 쌀을 한되주자. "이집은 모두 나쁜 사람만 있는줄 알았더니 고마운 분도 있다"고 하며 서서히 동구밖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영감이 조밭에서 조를 열심히 가꾸고 있는데, 마침 중이 지나며 하는 말이 "조가 크거든 조이삭을 잘라두면 천 석의 조가 나올 것이다."고 하였다 이말을 들은 영감은 조가 자랐을 때 조이삭을 모조리 잘랐다. 잠시후 갑자기 하늘에서 먹구름이 밀려오고 천둥이 치자 어짜할바 모르던 영감은 순간 번쩍하는 동시에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후에 그의 아들이 만들었는지 지금도 송강동 입구의 밭 가운데는 둥그런 묘가 있어서 길다란 밭은 둘로 나뉘었고, 사람들은 이묘를 조천석의 묘라 부르게 되었다.

  • 조선조 숙종때 이야기다. 여기에 사는 정재일이라는 사람이 나무를 하러 신봉동 뒷산에 올라갔다. 정재일이라는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으로서 하루에 몇 번씩 나무를 했는데, 오늘도 서너 번 나무를 하기 위해서 바삐 지게를 짊어지고 내려오려는데 어디선가 노루 한 마리가 상처를 입고 다리를 절며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바라보고 있는데, 그 노루는 몇 번이고 머리를 끄덕거리더니 막 지고 일어서려는 나뭇단 안으로 숨는 것이었다 그는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하고 망설이고 서 있었다. 그대 마침 숲을 헤치며 포수가 달려와서 여기에서 다리를 다쳐서 절뚝거리며 지나가는 노루를 못 봤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노루가 지금 막 이 앞으로 지나서 저쪽 산으로 도망가 더라고 말하자 포수는 노루를 잡을 욕심으로 그 쪽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는 포수가 산을 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거리다가 포수가 산을 넘어 보이지 않자 나뭇단을 헤쳐주니 그 노루가 나와서 고맙다고 몇 번이고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는 이쪽으로 도망가라고 포수가 간 곳의 반대방향을 가르쳐 주자, 노루는 또 알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이번엔 자꾸 주둥이로 산봉을 가리키며 발로 땅을 파는 시늉을 하고 몇 번이고 땅에 누웠다, 일어났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알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자 노루는 그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후 그는 죽기 전에 자식들에게 유언하기를 자기 산소는 그 노루가 가르쳐 준 산봉을 가리키며 거기에 써 달라고 해서 그 산봉에 썼다 하는데, 지금도 그 산소가 산봉에 있으며, 그후 이곳을 가르켜 노루가 산소를 잡아 주었다 하여 '노루봉'이라 부른다.

  •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황룡리에 사는 송석호는 꿈에서 깨어나서 생각하기를 참으로 기이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어지러워짐에 따라 민심은 허약해져서 사람이 산다는 멋도, 맛도 잊혀져가고 있을 때였다. 나라를 구원하고 민심을 수습하겠다고 금강산 관음봉에서 태어난 최교주도 송석호와 같은 꿈을 꾸었다. 바다로 면한 한적한 산골을 넘어서 깊은 골짜기에서 들리는 석종소리를 듣고는 바로 저소리가 혼탁한 민심을 바로잡을 소리라 했다. 그 이튿날 밤 송석호는 잠자리에 들어서 또 꿈을 꾸게 되었다. 이번에는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산과 푸른 물이 흐르는 계곡사이로 소한 마리가 바삐뛰어서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산정상에서 없어지자 어제와 똑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한쪽에서 '사인여천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이란 말이 메아리쳐 왔다. 그리고 그소리가 그치자 또 달려 다니던 소는 산 정산에서 내려와서 숲속으로 물이 흐르는 계곡과 산을 헤매이다가 아득하게 멀리 보이기 시작하면서 어디론다 사라졌다. 송씨는 억지로 꿈에서 깨어나려고 몸부림치다가 겨우 꿈에서 깨어나서는 바른 자세로 앉고 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렇다. 이것은 하늘의 계시다. 그래도 하늘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 구나. 그렇지 앞으로는 유불선합일의 무극대도만이 백성들의 갈 길이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하지만 그 종소리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또한 소가 푸른숲과 푸른물이 흐르는 계곡을 달리다가 산정상에 올라갔을 때는 종소리가 들리고 말의 울림이 들리니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오늘꿈속에 나타났던 일이 모두 수수께끼만 같았다. 송씨가 그런 꿈을 꾸던 날 교주도 꿈을 꾸었다. 꿈에 금강산에서 벗어나 차령산맥의 줄기에서 황소가 뛰어오고 있었으며 그 황소는 금강산 기슭까지 왔다가는 다시 되돌아서서는 쏜살같이 사라졌었다. 교주는 생각했다. ' 백성이 바로 저 황소와 같은 거다' 그러나 황소는 누우런 빛깔도 아니고 검은 빛깔도 아닌 누르스름한 빛깔이었다. 교주는 생각했다. '백성이 찌들어서 소도 찌들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는 그소가 없어질 때 들려왔던 종소리를 생각했다. '저 종소리를 잡아야 한다. 저 종소리의 연유가 궁금하구나.' 교주가 그리 생각하고 소의 모양과 백성의 찌들은 얼굴을 생각하면서 백성을 구할 길을 모색하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꿈을 꾼지 바로 다음날 송씨도 또 꿈을 꾸게 되었다. 이번에는 자기가 사는 성주산 기슭 개천에서 어제 나타났던 황소와 똑같은 소가 나타나서 계곡을 타고 한참 올라가다가 숲을 헤치고 산으로 올라가서는 산 정상에 이르러 소가 없어지더니 어제와 똑같은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으며 이번에는 크게 "인내천"하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태양의 불빛이 강하게 땅으로 내리 쬐이는 것이었다. 송씨는 그때 꿈속에서도 하늘을 우러르며 합장을 했다. 햇빛이 서서히 물러가고 다시 푸른 소나무숲이 보이기 시작할 때 황소는 산정상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송씨는 꿈속에서도 그 황소가 달려가는 곳을 유심히 살폈다. 황소는 푸른 숲을 헤치고 나와서는 계곡을 한참 내려오다가 물살을 헤치고 건너와서는 주위를 살피고 조용히 앉았다.그리고 황소는 없어졌다. 송씨는 꿈속에서 깨어나며 "저 황소다"하고 소리를 쳤다.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다시 합장을 했다. 하늘이 계시라고 꿈을 꾸며 "저 황소다"하고 소리칠 때 교주도 똑같은 꿈을 꾸었으나 소리는 치지 않았다. 송씨는 그 이튿날 동이 트자 황소가 나오고 달려와서는 없어진 계곡을 찾아갔다.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계곡을 따라가다가 물가에 서서는 이곳에서 황소가 건너갔다고 생각하고서는 냇물을 건너갔다. 냇물을 건너서 얼마 가지도 않아서 꼭 황소를 닮은 돌을 뱔견했다. 그는 그 돌앞에 무릎을 끓고는 작은 돌을 주워서 한 번 그돌을 때려 보았다. 돌에서 나오는 소리는 꿈속에서 들었던 종소리와 비슷했다. 그래서 송씨는 이 돌은 하늘에서 내린 돌이라고 생각하고 1925년 9월 15일 수운교 전당에 안치하고는 종을 울리게 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