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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공

    우공은 조선시대 초기 북방수비와 내란평정에 용맹을 떨쳐 큰 공훈을 세웠던 무관이다. 유성구 덕진동에서 성장한 우공의 자는 현규이고, 호는 운암 또는 하정이며, 시호는 양장이다. 본관은 단양으로, 고려시대 말기에 문하좌시중으로서 단양 부원군에 봉해졌던 우현보의 현손이다. 부친 우계로와 모친 정경부인 김해 김씨 사이에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난 우공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용맹이 남달리 뛰어났다. 29세때인 1443년에 내금위에 소속되어 근무하고, 1444년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에는 중시에 뽑혀, 정사품 품계의 변방수비 무관직인 축두포 수군만호가 되었다. 그후 제위진무, 경원판관, 군기판관, 경성판관등을 지냈고 46세때인 1460년 훈련원사가 되었다. 1463년에 다시 종이품의 품계인 가선대부로 승진되어 의주목사가 되었다.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난을 진압하여 삼등공신으로서 정충적개공신의 호를 받고, 정이품의 품계인 자헌대부로 승진하였으며, 단성군에 봉해졌다.

    우공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해의 9월에 토벌군이 북상하자 명나라와 협력하여 남만주 지역에 위치한 건주의 여진족은 정벌하였는데 이대 참전하여 공훈을 세웠고 , 토벌을 끝내고 돌아와서 포상과 함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470년에는 오위도총부의 상호관과 동총관을 겸했다. 1471년에는 신숙주 등과 함께 치국평천하할 것을 힘써 간하여 순성좌리공신의 호를 받고, 다시 단성군에 봉해졌다. 말년에는 부친의 연로함을 이유로 상소를 올려서 벼슬을 물러나기를 청하여 경상남도의 삼가군 장전촌에 살면서 극진히 효도하며 봉양하였다. 그러다가 1473년 1월 3일에 부친이 82세의 나이로 죽자, 우공은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병을 얻어 1월 8일에 59세의 나이로 죽었으니, 그는 평생을 외침과 내란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데 헌신한 충신무관이었다.

  • 홍석복

    조선 전기 문신. 대전시 유성구 지족동에 처음 이사와서 산 남양홍씨 유성문중 입향조이다. 자는 숙형, 본관은 남양. 천안군수 사원의 아들이고 기묘명현 정암 조광조의 문인이고 기묘사화에 스승과 같이 피화를 입은 증영의정 순복의 아우이다. 석복이 이곳 지족동에 입거하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1519년 기묘사화때 공보다 11세 연장인 친형 순복이 전라도 남원 사동방 구술(전북 남원군 사매면 계수리)에서 유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정암 조광조 선생외 70여명이 피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관학유생들을 대거 대동하여 상장하고 항쟁하다 순복 역시 화를 입게 되었다. 그 화가 삼족에 미치므로 석복은 난을 피하여 유성구 지족동으로 도피 잠입하였다. 그리고 사헌부 집의인 파평 윤사석의 증손녀를 처로 맞은 후 처가 동네에서 살았다. 그래서 공이 남양홍씨 유성문중 중시조요, 입향조가 된 것이다.

    공은 천성이 청덕순행하고 거행고결하여 기상이 월등하고 총예가 뛰어나서 문학이 숙성하였으며 행의가 기의계체하고 노성혁세 하였다. 1534년 갑오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는 뜻이 별로 없고 생원만으로 만족하고 청렴하게 살면서 학문에 더욱 힘쓰고 후학들 훈도에 힘썼다. 1541년 신축에 졸하니 천수가 39세였다. 묘는 유성구 지족동 삼미천곤좌원에 있다. 기묘사화 후 25년이 지나 인종 갑진에 피화당한 분들에게 신원이 되니 공의 형 고암공 순복도 영의정에 추증되고 논공행상으로 석복 이하 누대에 증직과 전장을 하사 받았다. 공의 후손들은 번창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480여년 동안 살아왔다. 그의 묘비에는 천품이 순근하고 효제를 행하니 향우간에 존중을 받았다고 쓰여있다.

  • 김집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저명한 주자학자였다. 자는 사강, 호는 신독재, 시호는 문경이고 본관은 광산이다. 부친 장생과 모친 창녕조씨 사이의 2남으로 한양 황화방 정릉동 경제에서 태어났다. 김집은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비록 서울 태생이기는 하지만 관직에 있을 때를 제외하면 늘 충청도 연산의 고향에 돌아와 살며 강학과 저술에 힘썼다.

    그는 죽은후 이곳의 유명한 천호산에 묻히었다. 일찍이 공의 9대조 약채가 충청도 연산으로 낙향하였는데 이 때부터 그의 가문은 이 지방에 세거하는 명족이 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그는 즉시 부친 장생과 함께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부모 봉양을 위해 사헌부의 직책을 사양하고 부여현감이 되었다. 1610년 헌릉 참봉에 임명되었다가 곧 면직된 것을 제외하면 진사가 된 후 이때까지 30여년 동안 재야에 묻혀 학문을 탐구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김장생 부자를 징소하였다. 그것은 이들이 서로 동문수학의 학연이 있다거나 광해군 때에 관직에서 소원했었다는 이유만으로 김장생 부자를 맨 먼저 부른 것은 아니었다. 반정으로 인해서 동요된 인심을 안정하고 서인의 집권기반을 공고히 유지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부여현감, 임피현감에 제수되었고, 전라도사에 제수됐을 때는 부임하지 않았다. 1631년 부친 장생이 84세로 별세하자 예경에 의거해 3년상을 치렀다. 1634년 선공감 첨정에 이어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이때도 곧 사직했지만 환갑노인으로서 처음 중앙의 청요직을 받은 셈이었다.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의병을 모으다가 곧 종전되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1638년 사헌부 집의로 부르자 역시 사직하였는데 이후로는 집의를 네번 제수한 것 말고는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세자시강원의 원손보양관,찬선, 공조참의 요직을 몇차례 거듭 받았으나 거의 사양하고 나서지 않았다. 이 자리는 시강원의 찬선, 자의 등과 함께 산림대덕을 조정에 불러들이기 위해 김상헌의 제의로 설치한 관직인데 이때 처음으로 김집에게 두 번이나 제수한 것이었다. 1649년 인조가 돌아가고 효종이 즉위하자 김집은 76세의 나이로 다시 부름을 받았다. 이때는 송준길, 송시열, 이유태 등 그의 문하생도 함께 나오게 되었다. 효종은 관례를 깨고 김집의 품계를 가선대부 (종2품)로 올려 예조참판을 제수하였다.

    김집은 부친 김장생과 더불어 당대 제일의 예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예학'의 창설자이기도 하였다. 주자학의 세계 안에서도 주로 예학을 통해 현실을 내다보고 당면문제 해결의 방안을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효종을 위해서 예를 강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인주일심의 논리는 주자학의 유명한 인간본성을 잘 지켜서 사사로운 욕망을 막아야 한다는 천리인욕설(天理人慾說)을 원용하여 국왕이 궁중의 사사에 얽매이지 말고 공심으로 정사를 처결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되면 조정의 기강이나 민간의 생업이 다 모두 잘 되어갈 것이라는 주장이다. 83세로 죽을 때 까지 부친 장생의 저술을 다시 손질하고 보완하며 후진들과 강론, 문답하는 일로 여생을 보냈다. 죽은 후 김상헌과 함께 효종의 묘정에 모셔지고 옥천의 창주서원, 연산의 돈암서원, 부여의 부산서원, 광주의 월봉서원, 임되의 봉암서원, 황해도 봉산의 문정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1883년에는 문묘에도 배향되었다.

  • 조회일

    조선시대의 탁원한 문장가로 자는 이숙이고 호는 죽음이며 본관은 임천이다. 부친과 모친 전의이씨 사이에 셋째아들로 태어났을때 머리 위의 정수리 뼈에 연꽃 무늬가 있었다. 1601년에 진사시험의 초시와 복시에서 각각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임금이 그의 답안을 보고 크게 칭찬하여 일시에 유명해졌으니, 사람들은 그가 지은 부와 글씨가 중국의 대문호이며 서법가로서 적벽부를 지은 서동파와 같다고 하여 조적벽이라고 하였다. 그는 글씨에 매우 뛰어나서 일찍 임금이 병풍에 글씨를 쓸 서법가를 선발할 때 석봉 한호나 김현성이 모두 감히 그를 당해내지 못하고 물러났다 한다.

    1602년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저작이 되어 명나라의 용만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이어서 승정원의 주서가 되었다 그후 명나라 임금의 사신으로 주지번이 왔을때 그는 예조좌랑으로 특진하여 종사관으로 사신을 영접하였고 그의 시명을 떨쳤다. 1609년에도 독서당에 있다가 종사관으로 명나라의 사신 웅공화를 영접하여 시문으로써 이름을 떨쳤고 이어서 다시 사간원정언이 되었으며, 형조좌랑과 예조좌랑을 거쳐서 또 다시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그후에 그는 다시 세자시강원사서를 거쳐서 사헌부 지평고 세자시강원 문학을 여러차례 지냈고 홍문관에 있다가 이조좌랑이 되었으며 시문의 시험에서 네차례를 연속으로 장원하여 이조정랑으로 승진하였다.

    1613년에는 김제남의 일파로 몰려 파직되었으며, 1617년에는 허균이 주도했던 광해군을 비방하는 내용의 투서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몰려서 이산으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났고, 그후 덕산에서 3년 동안 우거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다시 등용되어, 홍문관수찬, 홍문관교리, 홍문관부응교, 승정원승지등을 역임하였고, 1624년에는 이괄의 난을 당해서 공주까지 임금을 호종하였다가 환도한후에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광주목사로 나갔으며 그후 다시 예조참판이 되었다. 1626년에 다시 가의대부로 특진하여 병조참판이 되었고 1630년에 형조참판이 되었다가 곧 다시 예조참판을 거쳐서 경상감사가 되었다. 1634년에는 다시 예조참판이 되었고 1636년에는 강릉부사가 되었으며 1638년 2월 20일에 병으로 죽으니 향년 64세였다.

  • 김반

    광산김씨로 전민동에 세거하는 사람들은 허주공파의 자손이다. 공의 자손들이 전민동에 세거하게 된 것은 공의 묘소가 이곳 전민동에 있기 때문이다. 공의 자손은 공의 호를 따서 허주공파라 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반의 관향은 광산으로 자는 사일이며 호는 허주이다. 조부는 예조 참판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황강 계휘로 총명한 재주와 학문이 당시의 으뜸이어서 율곡선생까지도 매번 그를 제일이라고 칭찬하였다. 부친은 조선조 예학의 대가이며 당시의 유종이었던 사계 김장생이었고, 모친은 창녕조씨이니 판동녕 부사 광원의 손녀이며, 부사 대건의 딸로, 공은 1580년 2월 서울 정릉동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605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여기에서 사우들로부터 중히 여김을 받았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서삼촌 두 형제가 체포당하여 고문을 받고 사망한 일이 발생하자 벼슬길에 마음을 끊고 부형을 따라 고향에 내려와서 10여년을 지냈다. 계해반정 직후에 빙고별제를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624년에 이괄이 난을 일으켜 임금이 공주로 피신하자 임금의 행차를 호종한 공로로 성균관 전적을 제수받았다가 조금 뒤에 파면되었다. 곧 형조좌랑에 제수되어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에 전보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문학과 헌납, 직장, 교리에 제수되었다. 이때에 직언으로 면직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체찰사 종사관으로서 전라도와 충청도의 군정을 순찰하였다. 조정에 돌아와 겸문학지제교로서 부응교에 승진되어 사간원집의 ,응고, 겸필선, 종부시, 상의원 등 정의직에 전임되었다. 1629년에 사인 겸보덕에 제수되어 집으로 옮겼다가 면직되었다. 1630년에 다시 집의 , 응교로 제수되자 상소로 사직하고 사인, 전한을 거쳐 집의로 옮겼다가 또 전한으로 제수되었다. 1631년(인조9) 8월 부친의 상을 당했을 때 여막에 거처하면서 예제를 다하였다. 1633년 복상을 벗자 다시 사인과 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응교로서 소명을 받고 서울에 올라가 전하겸보덕에 제수되었다. 1634년에 여러차례 사인, 응교, 전한이 되었고 사이에 장악원정도 되었다. 1635년 사간 동부좌부승지, 형조참의를 거쳐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1636년에는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을 제수했으나 모두 신병으로 사양했다. 겨울에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병자호란의 국난을 잘 극복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워, 뒤에 대사성, 예조참판, 부제학등으로 임명되었고 다시 이조참의 겸 동지경연이 되었으며 또 병조참판, 대사헌으로 옮겼다가 신병으로사직했다. 초취는 안동김씨로 첨지 진려의 딸이며 재취는 연산서씨로 증참판 주의 딸이니 모두 정경부인이 되었다. 특히 서부인은 대단한 부덕이 있어서 늙어서도 몸가짐이 단정하여 내외의 친척들이 그 예법과 경건함을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에 어린 자녀들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적들이 성에 가까이 오자 목욕재계하고 자결하였다. 아들 익겸과 딸 하나도 죽으니 사람들이 더욱 가법에 바탕이 있음을 믿게 되었다. 6남 5녀를 두었는데 김씨부인이 1남 3녀를 낳았고 서씨부인이 5남 2녀를 낳았다. 김씨부인이 낳은 1남은 부사를 지낸 장자 익렬이고 3녀는 부사 이정, 대사헌 이후원, 수찬장차주 등에게 출가하였다. 서씨부인이 낳은 5남은 문과급제하고 대제학과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익희와 생원시에 장원하고 강화에서 순절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에 추봉된 익겸, 형조참판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익훈, 승문원 정자였으나 일찍 죽은 익후, 대사헌을 지낸 익경 등이며, 2녀는 진사 이해관과 심약제에게 출가하였다.

  • 이유태

    조선후기의 유학자. 이유태는 인조 ~ 숙종조의 이름난 유학자로 특히 시무에 밝았던 정치사상가였다. 그의 본관은 경주, 자는 태지, 호는 초려, 시호는 문헌이다. 1607년에 아버지 이서와 어머니 청풍김씨사이의 5형제 중 셋째 아들로 금산 노동에서 출생하였다. 공의 선조는 서울에서 세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직후 그의 아버지가 충청도 금산으로 이사하면서 금산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청년기에는 공부를 위해서 진잠과 연산에서 상당기간을 지냈다. 그리고 장년기에는 금산과 진산, 그리고 공주의 초외(현 유성구 도룡동)에 이사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 10세가 되던해에 부친을 여의었고, 15세때에 부친의 유언에 따라 진잠의 처사 민재문에게 나아가 배웠고 민재문의 추천을 받아 사계 김장생의 문화에서 수학하였다.

    이유태가 20세가 되던해에 그의 스승인 민재문이 작고하자 장례를 한결같이 가례를 좇아 행하였다. 24세에 별과에 합격하였으나 마침 이때 어머니의 병환이 심하였으므로 간호를 위해서 전시를 포기하였다. 이듬해 스승 김장생이 작고하자 장례를 지내고 김집을 대신 스승으로 모시고,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등과 함께 그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1634년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희릉참봉에 출사하였으나 학문을 계속하기 위해서 곧 귀향하였고 다시 건원릉의 참봉이 되었으나 병자호란으로 6개월도 채 봉직하지를 못하였다. 이후 그는 병자호란 직후까지 대군사부, 내시교관, 시강원자의 등의 벼슬을 연이어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이때 그는 무주의 덕유산 산미촌에 들어가서 오로지 학문과 후진의 교육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의 북벌의지에 명분과 기대를 걸고, 출사를 단행하였다. 그의 나이 43세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사림의 대거진출은 당시의 집권세력간의 갈등으로 비화되게 되었다. 그가 올린 상소로 인하여 과거의 응시자격이 정지되는 정거에 처해졌다가 7년 만에야 풀려나게 되었다. 이유태는 이 정거의 기간 중에 향촌에 머물러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가 유성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기간이었다. 1656년 그는 다시 공조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모친의 병환과 자신의 부덕을 내세워 출사하지 아니했다.

    1659년 그는 송시열 , 송준길, 유계, 허적 등과 더불어 2차 밀지오신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아갔다. 정거령이 풀린 후에도 계속 불출사를 고집하던 그가 돌연히 조정의 부름에 응했던 것을 보면 이때 그는 효종의 밀지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상경한 지 며칠 만에 출사를 포기하고 다시 환향하고 말았다. 그리고서는 곧 바로 2만여자에 달하는 장문의 『기해봉사』를 작성하였다. 이 봉사는 당시의 국정 전반에 걸친 정치개혁안을 담고 있는 매우 주목되는 봉사로서 효종의 북벌의지의 실현을 위해 작성된 것이다. 한편, 이때쯤 해서 이유태는 17세기 후반의 정치계를 풍미하였던 예송에 불가피하게 관여케 되었다. 이 복제 논쟁은 당쟁으로 비화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 현종이 죽고 숙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남인이 집권을 하자 서인의 예론에 대한 논천이 비등해 졌고, 이로 인하여 서인계는 모두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때 이유태도 영변에 유배되었다가 5년반이 지난 73세때에야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말년은 공주 금강변의 중호로 돌아와 이곳에서 독서로 여생을 보내다가 1684년 78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 송시도

    우암 송시열의 아우이며 주자학에 밝아 당시 소우암으로 불리우던 송시도의 자는 성보이며, 호는 세한재이다. 본관은 은진이며, 아버지는 증영의정 갑조로 자품이 엄중하고 기절이 뛰어났다. 어머니 증정경부인 선산곽씨는 봉사 자방의 딸로서 서사에 밝았다. 그는 충북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1613년 12월 10일에 태어났으며, 품성과 기질이 순순하고 아름다워 어릴 때부터 효도와 우애가 돈독했다. 그는 형인 시열과 서로 공구하고 격려하며 연산의 사계 김장생에게 나아가 학문을 사사하였으며, 학문과 덕행이 일찍 드러났다. 1655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슬픔속에서도 예를 갖추었다. 1659년에 향천으로 내시교관에 제수되고, 그뒤 1662년 장흥고주부를 역임하고, 그해 가을에 영산현감을 지냈다. 그러나 1663년에 아들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그만 두었다. 가을에 다시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가 1664년에 봄에 지방으로 내려가 청안현감으로 있었다.

    곧이어 1666년 봄에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여름에 보은현감을 제수 받았으나 조그마한 협의로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같은 해 가을에 다시 감찰이 되어 의빈부도사로 옮기고, 겨울에는 익산군수에 제수되었다 익산군수로 재직하던중 해마다 흉년이 들어 고을 주민들이 생업에 안주하지 못하자 , 마음을 다하여 진구정책을 시행하여 빈민을 구제하는데에 온힘을 기울였다. 1672년 겨울에 전라도 장성부사로 부임하였으며, 곧바로 학교를 흥기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덕행을 숭상하고 학문을 숭상하는데에 깊이 힘썼다. 그래서 필암서원 등을 세워 하서 김인후를 배향하고 학자를 초빙하여 사민을 교육시킴으로써 문풍을 진작시켰다. 1675년 형 시열이 덕원에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따라서 시중을 들었다. 이때부터 당시 치열하였던 당쟁의 전말, 이에 대한 조정의 처리과정과 형 시열이 여러차례 유배된 배경 등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여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 민광경

    조선후기의 효자, 초명은 광태, 자는 중회, 본관은 여흥, 할아버지는 여검이고, 아버지는 환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이다. 묘는 대전시 유성구 도룡동 호동에 있다.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1세에 부친을 여의었고 그다지 건강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친으로부터 생래적으로 충절과 지극한 효행정신을 이어받았고, 효성과 덕행이 출중한 백부 평에서 큰 가 르침을 받았다. 자제을 가르치는 데 있어 항상 의리를 첫째로 중시하였고, 사람을 대함에 성실을 생명으로 하되 복례라 하더라도 공손하게 대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성을 바탕으로 하여 어느쪽으로도 편중되거나 기대지 않고 포용하는 인격으로 모든 사람을 대접한 것이라 하겠다. 의리로써 몸가짐을 장엄하게 하되 다투지 않았으며, 성실로서 집단속에 거처하면서도 파당을 짓지 않았다. 그의 삶의 철학과 사상은 선유와 선대의 정신을 몸소 생활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아울러 자손과 주변 사람들에게 인간다움의 참모습을 진솔하게 가르친 것이다. 그는 송시열을 겸모하여 스승으로 섬기고 예에 대하여 의문이 생기면 언제나 곧 질문하곤 하였다. 시를 잘 지어 유고가 약간 남아 있다.

  • 김만중

    본관은 광산.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자이자 김집(金集)의 손자이다. 아버지 익겸(益謙)은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유복자로 태어났다.

    1665년(현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이 되고 헌납(獻納)·사서(司書) 등을 거쳤다. 1679년(숙종 5)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대사헌에 이르렀으나, 1687년(숙종 13) 경연에서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 로 인해 선천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왕자(후에 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자 그도 왕을 모욕했다는 죄로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이렇게 유배길에 자주 오른 것은 그의 집안이 서인의 기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치열한 당쟁을 피할 수 없어서였다. 현종초에 시작된 예송(禮訟)에 뒤이어 경신환국·기사환국 등 정치권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그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

    그는 많은 시문과 잡록, 〈구운몽〉·〈사씨남정기〉등 의 소설을 남기고 있다.〈서포만필〉에서는 한시보다 우리말로 씌어진 작품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여, 정철의〈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을 들면서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오직 이것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소식의 〈동파지림 東坡志林〉을 인용하여 아이들이 〈삼국지연의〉를 들으면서는 울어도, 진수의 〈삼국지〉를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여 소설이 주는 재미와 감동의 힘을 긍정하였다. 이 때문에 그 자신이〈구운몽〉·〈사씨남정기〉같은 소설을 직접 창작할 수 있었다. 이규경의 〈소설변증설〉에 전하는 바로는〈구운몽〉은 어머니의 시름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며,〈사씨남정기〉는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썼다고 한다. 창작동기를 그대로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이 주는 감동적인 효과를 의식하고 썼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저서로는 시문집인 〈서포집〉, 비평문들을 모은 〈서포만필〉 등이 있으며, 행장(行狀)에 의하면〈채상행 採桑行〉·〈비파행 琵琶行〉·〈두견제 杜鵑啼〉등의 작품을 지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 박문수

    조선시대 문신이다. 자는 성보이며 호는 기은이었다. 그리고 본관은 고령이다. 항한의 아들로 태어났다. 1723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후 사관이 되고, 이듬해 설서, 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 노론이 집권할 때 사직되었다. 그러나 1727년 에는 영조가 당재의 목적으로 정부의 대대적인 인사를 개편하는 사건이 일어나 다시 사서에 기용되었다.

    1728년 3월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오명항이 이인좌의 군대를 대승케 하는 데 대단한 공로를 세웠다. 이러한 그의 능력이 영조에 의하여 발탁되어 경상도 관찰사에 이르고 분무공신 2등으로 영성군에 봉해졌다. 1734년 진주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호조참판이 되었고 1737년 도승지, 병조판서등을 지냈다. 이듬해 다시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공이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이 탄핵되어 풍덕부사로 좌천당하였다. 그러나 1741년에는 어영대장을 거쳐 함경도 진휼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때 공이 경상도의 곡식 1만섬을 실어와서 기민을 구제하였기 때문에 공덕비가 세워졌다.

    그후 병조판서를 역임했고 1743년에는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이듬해 황해도 수군 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45년에는 어영대장에 지임되었으며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의 폐해를 논하다 충주목사로 다시 좌천되었다. 그후 영남균세사를 거쳐 지성균관사, 판의금부사, 세손사부를 거쳤다. 그러나 1752년 왕세손이 죽자 약방제조로 책임을 추궁당해 제주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풀려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공은 특히 군정과 세정에 밝았고 특히 암행어사 때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충헌이다. 편서로서 탁지정례, 국혼정례 등이 있고 문집[기은집]이 있다. 한편 그의 글씨로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가 전하여 지고 있다. 묘소는 천안시 목천면에 있으나 그의 부모의 묘소는 유성구 복용동에 있다.